영화 <왕과 사는 남자> 리뷰
충신불사이군.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제나라의 충신 왕촉이 남긴 유언이자, 훗날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육신을 상징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처럼 '충(忠)'은 시대를 막론하고 삶의 숭고한 가치로 추앙받아 왔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왕정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권위에 대한 혐오는 일상이 된 지금, 이 오랜 가치는 갈 곳을 잃은 듯 보인다. 바로 이 지점에서 질문은 시작된다. 장항준 감독은 어떻게 고리타분하게 보이는 이 '충의 가치'를 되살리고, 지금의 세대를 설득해 냈는가.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사육신과 단종이라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궁궐의 역사 대신, 엄흥도와 이홍위라는 궁궐 밖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하는 데서 바로 그 답을 찾는다. 이 관계의 시작은 장사꾼과 손님이라는 이해타산적인 관계다. 엄흥도는 순전히 자신이 속한 마을의 이득을 위해 이홍위를 청룡포로 모신다. 여기엔 오직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안녕을 위한 선택이었을 뿐, 인간적인 교류나 동정은 없다.
이는 일반적인 대중이 가지고 있는 권력을 향한 시선이 드러나는 장면이기도 하다. 살아있는 권력을 대면해 본 적 없는 흥도는 권력을 자신의 삶을 더 역전시킬 수 있는 '일확천금의 기회'로 바라본다. 그 기회라는 것조차 쌀밥과 고깃국을 먹는 아주 사소한 것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이홍위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태어나서 한 번도 궁궐 밖을 나서지 못한 그 역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이 관계를 시작할 의지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 피상적 관계는 흥도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던 홍위를 살리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흥도에 의해 목숨을 구한 홍위는 또다시 호랑이로부터 흥도와 백성들을 구한다. 흥도의 구원이 자신의 안위를 위해 구했던 것이라면 홍위의 구원은 다르다. 온전히 백성들을 위해, 이해타산 없이 행한 순수한 선의이다. 이렇게 서로의 은인이 된 두 사람은 점차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여기서 함께 밥을 먹는 것이 중요한 장면으로 반복해서 등장한다. 밥을 먹는다는 것은 권력의 높낮이에 상관없이 인간이라면 모두가 행하는 일이다. 가장 일상적이면서 가장 계급의 차이가 쉽게 드러나는 이 행위를 통해, 홍위는 음식이라는 매개체 뒤에 가려진 사람을 비로소 만나게 된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음식을 먹으며, 사람 대 사람으로서 마침내 서로를 마주하는 둘. 이때부터 홍위의 눈빛은 점차 달라지기 시작하며 둘의 관계 역시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부자의 관계로 성장한다.
여기서 홍위와 대비되는 권력의 모습으로 한명회가 등장한다. 백성을 위해 호랑이를 향해 활을 겨눴던 홍위와 달리, 한명회의 활은 민중을 향한다. 한명회의 시선은 늘 내려다보지만, 홍위의 시선은 늘 눈을 마주한다. 이 외에도 영화는 대조를 활용해 밋밋하게 다가올 수 있는 이야기에 새로운 볼거리를 불어넣는다.
그 연출이 정점을 발하는 순간은 바로 홍위의 최후다. 극 초반 흥도는 홍위를 청령포로 모시기 위해 뗏목의 줄을 당긴다. 오로지 자신의 이득을 위해, 그리고 홍위를 섬에 가두기 위해. 그러나 홍위가 숨을 거두는 순간, 흥도는 그를 섬에서 내보내기 위해, 그의 안녕을 위해 줄을 당긴다.
사실 살아있는 권력이 서민을 만나 감화되는 이야기는 이미 너무 많이 알려져 있다. 이 영화를 보며 계속 떠올랐던 <광해, 왕이 된 남자>를 비롯해 넓게는 신데렐라 스토리를 답습하는 드라마 역시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가 특별한 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것과 낯선 것을 영리하게 활용한다는 점이다.
유해진이라는 국민 배우에서는 서민의 얼굴이라는 익숙함이, 박지훈이라는 신예를 통해 어리고 유약한 권력의 이면을 그려내는 연출에는 낯섦이 느껴진다. 동시에 감정적인 과잉 없이, 착실하게 순리대로 쌓아가는 극의 흐름 또한 적절하다.
물론 감정적인 소구에만 머물지 않는다. 흥도를 만나고 변해가는 홍위의 모습은 관객에게 진정한 지도자는 어떤 인물인지 계속 묻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