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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혁 Nov 14. 2021

영화 <소리도 없이> 리뷰

교활한 선과 무지한 악이 공존한 대가

 중년의 남자와 젊은 청년이 골목에서 계란을 팔고 있다. 아줌마들과 시시한 농담도 주고받으며 장사를 하던 이들은 트럭을 몰고 외진 곳으로 향하더니 옷을 갈아입기 시작한다. 우비로 갈아입은 이들이 향한 곳에는 피투성이의 남자가 밧줄에 묶인 채 천장에 매달려있다. 이들의 직업은 범죄조직의 하청을 받아 시신을 수습하는 일, 결국 범죄자들이다. 


영화 <소리도 없이>는 창복과 태인의 계란 장사에서 시체 처리로 이어지는 오프닝 시퀀스를 통해 악의 평범성을 치밀하게 그려낸다. 이들의 작업은 어딘가 서툴지만 전문적이며, 주저함이나 죄책감을 느끼는 묘사는 전혀 묘사되지 않는다. 태인과 창복에게 이 일은 사람들에게 넉살 좋은 웃음을 팔며 골목에서 계란을 파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일을 '지시'하는 누군가의 명령을 듣고,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받는 것. 이 과정만 보고 있으면 악이라는 것은 그렇게 합법적인 '일'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 진행되는, 그렇게 불합리하지는 않은 것처럼 보인다. 


창복은 누구보다 이 일에 만족, 혹은 순응한 인물처럼 보인다. 불합리한 조건에 투덜거리는 하지만 결국 조직의 명령을 수행하며, 풍수지리적인 조건을 따져가며 시체를 매장하거나, 파묻은 시체를 종교적인 예를 갖춰 보내는 모습을 보면 자신이 하는 일에 나름의 기준 또는 직업적 윤리의식이 세워진 인물로 보인다. 창복에게 일은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철저히 권력에 복종하고, 저항하지 않으며 현실에 만족하며 살아간다. 

반면 태인은 이 일들을 수동적으로 해낸다. 창복처럼  금전적인 대가를 따지는데 밝지도 않고, 오히려 돈에 무관심한 인물이다. 아무 생각 없어 보이던 태인이 조직원들의 정장을 정리하며 처음으로 자신의 욕망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창복과 마찬가지로 '부'에 욕심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태인의 근본적인 욕망은 바로 창복과 함께하는 이 좁은 세계를 벗어나 정상적인 범주의 사회에 속하는 '사회화'다. 


태인이 말을 하지 못하는 '신체적 결핍'과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한 채 평생에 가까운 시간을 '사회적 결핍'을 지닌 채 살아온 인물이다. 이런 자신과 달리 사회적, 경제적으로 높은 계급에 속해있으며 자신보다 더 고등적인 사고가 가능한 초희를 만나며 사회화를 향한 태인의 갈증은 더 심해진다. 옷을 개지 않고 그대로 내팽개치거나 동생을 비위생적인 환경에 방치하는 등, 그동안 자신이 규범이라고 믿고 있었던 '무규칙'을 하나둘씩 초희가 고쳐나가는 과정을 보며 태인은 큰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아이 같은 어른과 어른 같은 아이. 이 둘의 기묘한 동거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서로 어울리는 듯 보이지만, 초희가 임시방편으로 끼워놓은 식탁 다리처럼 간신히 균형을 유지하지만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상태다. 한 가지 명심해야 할 점은 초희가 베푸는 선의의 뿌리는 본인의 생존이며 그 속에는 태인을 향한 어떤 동정이나 연민이 없다는 점이다. 바로 이 점이 드러나는 순간 영화의 서사는 뻔한 길을 밟지 않는다. 


초희가 베푸는 교활한 '선'은 태인의 무지한 악을 결국 감화시키고, 태인은 '정장'이라는 초희가 만들어 놓은 사회화의 상징과도 같은 소품을 입고 초희를 구해낸다. 아이러니하게도 '악'이었던 태인이 초희를 위해 약을 사며 처음으로 자발적인 선의를 드러내는 순간 초희는 처음 등장할 때부터 쓰고 있던 토끼 가면처럼 자신의 가면을 벗고 생존이라는 본능을 드러내며 도망가기 시작한다. 

이때 초희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혼란스러운 세상의 모습이 비친다. 처음으로 태인에게 도망치려 했던 초희는 '선'이라고 굳게 믿었던 할머니에게 오히려 배척당하고, 음흉한 취객처럼 보였던 아저씨는 사실 정말로 경찰이었다는 설정들은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없는 태인의 세계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요소들이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완전한 '선'은 경찰관 한솔이 유일하다. 그리고 그녀마저도 태인에게 죽임을 당하자 초희는 그동안 지겹도록 봐왔던, 태인의 악을 종용하며 모방한다. 


그렇게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닮아가는 듯 보였던 태인과 초희의 공존은 끝내 파괴된다. 정장을 입고 초희를 원래 있던 '세계'로 보내며 자신도 초희의 세계에서 살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태인의 믿음은 당연히 초희의 거부로 파국을 맞이한다. 아무리 정장을 입고, 호의를 베풀고, 선을 모방해도 결국 선이 될 수 없었던 악은 그제야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그렇게 빛을 피해 어둠으로 도망친다.  


<레옹>이나 <아저씨>처럼 '소녀의 희생으로 구원받는 악'이라는 뻔한 서사 대신 선과 악은 절대 섞일 수 없으며 악은 그 행위에 대한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는 냉정하지만 현실적인 교훈, 영화 <소리도 없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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