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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혁 Nov 24. 2021

악당의 사연

우리가 빌런을 좋아하는 이유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적어도 영화계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주장이다. 이미 악당의 서사는 확실히 ‘돈’이 되는 소재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다. 순수익 4억 달러. <조커 (2019)>가 받은 최종 성적표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전 세계가 악당의 사연에 귀를 기울이고, 심지어 공감까지 하게 될 줄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조커>를 기점으로 빌런을 바라보는 영화계의 시선은 확실히 달라졌다. 빌런은 어떻게 히어로들만 누리던 스포트라이트를 차지할 수 있었을까.


조연에서 주연으로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영화에서 빌런, 즉 악당의 역할은 지극히 한정적이었다. 주인공인 히어로의 대척점에 서서 히어로의 무결함을 강조하고,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미흡한 히어로를 본의 아니게 각성시키며 마지막에는 끝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거나 패배하는 인물. 즉, 빌런은 철저히 히어로의 서사를 완성하기 위한 도구적 인물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지금은 전 세계에 팬을 보유하고 있는 히어로물의 절대적인 강자 MCU조차도 비교적 초창기에는 빌런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영웅의 탄생, 혹은 각성을 위한 평면적 인물로만 묘사하기 바빴다. <캡틴아메리카: 시빌워>의 제모 남작과 <어벤져스> 시리즈의 타노스를 기점으로 비로소 영화는 악당에게 사연을 부여하고, 움직임의 동기와 캐릭터들이 가진 확고한 철학을 보여주었다. 그 덕분에 제모 남작은 실질적으로 어벤저스를 분열시킨 ‘진정한 의미의 빌런’으로, 타노스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굳건히 움직였던 철학적인 ‘슈퍼 빌런’으로 평가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악당들은 ‘조연’, 영웅들은 ‘주연’이라는 사실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빌런들이 본격적으로 조명을 받기 시작한 건 <조커>의 전 세계적인 흥행이었다. 사회적으로 학대를 받은 아서 플렉이 조커로 다시 탄생하는 순간 빌런들은 다시 태어나기 시작했다. 물론 이전에도 <베놈>, <수어사이드 스쿼드>처럼 ‘악당’들이 주연으로 등장하는 슈퍼 히어로 영화들은 존재했다. 다만 그 서사가 매우 빈약했고, 관객들은 여전히 악당들이 저지르는 액션, 즉 ‘결과’에만 관심이 있었다. <조커>는 반대로 ‘원인’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여기에 빈부갈등이라는 사회적인 담론까지 담아내면서 현실성을 강조했고, 관객들은 드디어 악당의 사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조커의 ‘순한 맛’ 정도로 묘사할 수 있는 <크루엘라>는 크루엘라라는 빌런의 서사를 정당화하는 대신, ‘엄마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통해 관객이 크루엘라의 선택을 납득할 수 있게 만들었다. 관객의 공감을 끌어냈다면 다음 과정은 평탄하다. 영웅의 서사와 마찬가지로 '탄생-내면적/외면적 갈등-각성- 해소'로 마무리하면 악당의 사연은 완성된다. 이렇게 빌런들은 세상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소재로서의 빌런


그렇다면 왜 하필 세상은 빌런이라는 소재를 택했을까? 첫 번째 이유는 다양성 존중이라는 범지구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움직임이다. 한국인 1세대 이민자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미나리>의 성공과 마블의 차세대 영웅으로 지목받은 아시아계 히어로 <샹치>만 보더라도 이미 영화계의 트렌드는 그동안 조명받지 못했던 인물들, 이민자 혹은 이방인들의 서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동안 슈퍼 히어로 영화에서 조연의 자리를 지키던 여성 히어로들이 <캡틴 마블>, <블랙 위도우> 같은 단독 영화에서 얼굴을 드러내며 마블 또한 이런 움직임에 응답하기 시작했다. 여성, 이방인, 빌런들은 그동안 조연의 자리에만 머물렀던 마이너들을 대변한다. 인싸와 아싸라는 이분법으로 대표되는 현대 문화에서 마치 ‘아싸’들의 흔하지 않은 문화들이 오히려 그 소수성을 인정받고 ‘힙함’의 상징으로 다시 주목받는 현상과 비슷하다. 단순히 생각하면 ‘그동안 보지 못했던 이야기’였기 때문에 관객들이 관심을 갖고, 마침내 영화표를 구매한다는 것이다. 


방송국이나 언론사가 독점하는 플랫폼의 콘텐츠들이 세상을 지배했던 과거와 달리 누구나 확성기를 들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대중은 큰 목소리 대신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마련이다. ‘나 또한 너희와 같다’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비로소 그룹에 속할 수 있었던 이전과 달리 이제 대중은 ‘나는 타인과 다르다’라는 메시지를 주저하지 않고 드러낸다. 이는 이미 완성된 콘텐츠를 소비하는 대신 적극적으로 자신의 취향에 맞는 콘텐츠를 찾고, 커스터마이징하는 MZ세대의 성향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즉 ‘빌런의 주연화’는 주 소비자층으로 자리 잡은 MZ 세대의 주류 대신 비주류를 선호하는 의식을 겨냥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대중은 기존의 서사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새로움이나 신선함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느끼는 순간, 이들은 가차 없이 고개를 돌린다.

“사람들은 연쇄 살인마를 좋아하잖아.” 


놀라지 마라, 영화의 대사일 뿐이다. <베놈2>의 메인 빌런, 클리터스는 자신을 찾아온 에디 브룩에게 이런 대사를 뱉는다. 다소 노골적으로 작금의 대중을 겨냥하는 이 대사는 불쾌하지만 정확하게 핵심을 짚고 있다. 앞서 언급한 첫 번째 이유가 문화적 흐름에서 형성된 이유라면 두 번째 이유는 다소 철학적이다. 대중은, 아니 우리는 연쇄 살인마를 좋아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빌런이 탄생한 배경을 분석해보면 결국 빌런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내면의 욕망을 형상화한 결과물이다. 무결하고 고귀한 주인공과 비열하고 이중적인 악당.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현실에 있을 법한 인물로 보이는가? 빌런의 존재는 지극히 현실적이다. 다만 악당과 대중의 차이는 악당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적절한 교육과정을 통해 잘 통제하고 있는지의 여부다. 


연쇄 살인마라는 인물은 혐오의 대상이 되지만 연쇄 살인마가 등장하는 다큐는 흥미롭다. 아무리 자극적인 소재라도 콘텐츠로 가공되는 순간 그 책임은 소비하는 대중 대신 창작자의 탓으로 돌려진다. 스크린이라는 현실과 가상을 구분하는 벽을 통해 우리는 악을 철저히 제삼자의 시선으로 관망한다고 ‘착각’한다. 그렇게 악당은, 악당의 사연은 콘텐츠로 합법적으로 소비된다. 


우리가 연쇄 살인마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안전한 방법으로 깊은 곳에 있는 인간 내면의 욕구를 해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욕구는 살인 같은 범법의 욕구가 아닌 악에 대한 호기심의 욕구다. 대중은 모든 것이 정형화되어있는 현대 사회에서 툭 튀어나와 다른 시스템을 파괴하는 ‘오류’ 같은 존재들을 신기하게 바라본다. 당연한 일이다. 늘 똑같은 존재들만 보다가 나와 다르며, 내가 속한 집단과 다르며, 집단의 규범과 전혀 다른 ‘돌연변이’들에 시선이 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리고 이 본성을 문화는 아주 잘 활용하고 있다. 


빌런이라는 소재는 확실히 흥미로운 대상이다. 그러나 영화 속 빌런들과 달리 현실의 악은 지극히 평범하며, 일상적이다. 악인은 비범한 존재로 묘사되어서는 안 된다.


영화 <암수살인>이 호평을 받은 이유는 연쇄 살인마라는 악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잊혀진 피해자들에게 예의를 갖추고, 피해자를 연쇄 살인마를 돋보이게 만드는 수치로 소비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다. 현실에서만큼은 빌런이 주연이 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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