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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혁 Nov 30. 2021

영화 <핵소 고지> 리뷰

집단을 뚫고 파고드는 개인의 신념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자신의 신념을 얻기 위해 가족의 죽음이라는 잔혹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던 소년, 스파이더맨을 연기한 앤드류 가필드는 또다시 한번, 자신의 신념을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선 인물을 연기한다. 이번에도 역시 누군가의 생과 사가 달린 절박한 상황 속에서 앤드류는 자신의 신념을 시험받아야만 한다.


전쟁에 참가는 하지만, 총은 잡지 않겠다는 신념과 함께 의무병으로 입대한 데스몬드 도스.  그의 굳은 신념의 배경에는 바로 가족들이 있다. 어린 시절, 홧김에 동생을 벽돌로 내려쳐 사경을 헤매게 한 데스몬드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종교적인 믿음으로 죄책감을 이겨 내려한다. '누군가를 죽일 뻔했던 과거'를 보여준 영화는 곧이어 '누군가를 살려낸 현재의 데스몬드'의 모습을 보여준다.


차에 깔려 부상당한 사람을 허리띠로 압박하는 응급처치로 구해낸 데스몬드는 의사에게 '당신이 살렸다'라는 말을 듣고 자신의 신념을 결정한다. 그러나 데스몬드의 이 신념이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은 바로 자신이 살기 위해 누군가를 죽여야만 했던 시대, 바로 전쟁의 시대이다.

데스몬드가 전쟁의 이상을 상징한다면 그의 아버지 톰은 전쟁의 현실, 상처 받고 버림받은 존재들을 대변한다. 그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 전우들의 무덤을 바라보며 톰은 세상에 대한 분노에 사로잡힌다.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과 전쟁의 트라우마로 가족에게까지 폭력을 휘두르는 괴물로 자라난 그에게 전쟁은 과거의 영광이 아닌 현실의 지옥이며, 자식들에게 대물려주고 싶지 않은 미래다.


결국 그의 뜻과 달리 입대를 결정한 데스몬드는 종교라는 신념 아래에서 보호받던 집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냉정하고 잔혹한 신념의 심판대에 오른다. 체력훈련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데스몬드는 총기 훈련을 거부하자마자 바로 집단의 '문제아'로 전락한다. 영화는 단순히 데스몬드를 영웅화하며 그에게 반하는 모든 신념을 반박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데스몬드가 신념을 지키기 위해 어떤 선택을 했으며, 그의 동료들이 그의 신념에 어떻게 감복되었는지 충실하게 행동으로 보여준다. 살생을 거부하는 데스몬드와,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어야만 했던 병사들 중 누군가의 선택이 옳고 그른지 영화는 말하지 않는다. 대신 아버지라는 인물로 대변되는 전쟁의 참극과, 전쟁으로 인해 희생된 개인에게 존중과 예우를 표하는 동시에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나라를 지켰던 인물들의 모습에 초점을 맞춘다.


또한 데스몬드를 단순히 고결한 영웅으로 그리지만 않는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자신의 결혼식 날 영창에 갇혀 있어야 했던 데스몬드는 그동안 참아왔던 분노를 터뜨리며 절규한다. 이 장면을 통해 멜 깁슨은 현실에서의 영웅은 고귀하고 무오한 존재가 아닌, 지극히 감정적이며 한계에 부딪히기도 하는 존재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데스몬드의 신념은 결국 핵소 고지 전투에서 증명된다. 아직 적군이 남아있는 고지에서 부상당한 동료들을 맨몸으로 구해낸 데스몬드의 존재는 그제야 집단에게 인정받는다. 단순히 믿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행동하는 신념. 다른 동료들이 총을 들고 자신의 신념을 증명했듯이, 데스몬드 또한 행동으로 자신의 신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낸다.

잊혀진 영웅들을 대표하는 아버지와, 자신의 이상을 증명해내며 떠오른 영웅을 대표하는 아들. 영화 <핵소 고지>는 이 두 인물의 대조된 모습을 보여주며 영화는 전쟁의 이상과 현실을 동시에 담아낸다. 한 개인을 단순히 영웅화하는데 그치지 않고, 인간적인 면모와 전쟁의 참극을 그대로 담아내며 관객들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균형을 잃지 않은 연출이 훌륭했던 영화다.    


그러나 멜 깁슨 영화의 특성상, 데스몬드의 기도가 끝나기까지 모두가 기다리는 장면같이 과하게 종교적인 색채를 드러내는 장면이나 미군이 승리를 거두는 장면에서 웅장한 배경음악을 깔며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장면은 조금 거부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감독의 사상과 별개로 영화 자체가 주는 메시지는 인상적이다. 나약한 개인이 굳은 신념을 가지고 어떻게 집단의 벽을 뚫어내는지 지켜보는 시간은 종교적으로도, 종교를 떠나 한 명의 관객으로서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자신의 신념을 쉽게 밝히기 어려운 오늘의 시대에서 영화 <핵소 고지>의 메시지는 더 빛을 발한다. 행동하는 신념은 집단을 바꾸는 잠재력이 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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