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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혁 Dec 19. 2021

살고 싶은 자에게는 용기를, 죽고 싶은 자에게는 목적을

영화 <소울> 리뷰

사람들이 디즈니 영화에 열광하는 이유는 바로 보편성이다. 우리 모두 <토이스토리>의 앤디가 그랬듯이 하루 종일 장난감을 가지고 이야기를 만들었고, <인사이드 아웃>의 라일리가 그랬듯 상상 속의 친구를 떠나보내 주어야 했고, 밤이 되면 <몬스터 주식회사>의 설리와 마이크 같은 괴물들이 찾아오지 않을까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어쓴 채 잠에 들기도 했다.


디즈니가 갖고 있는 이런 보편성은 국경을 넘어, 문화의 벽을 허물고 아이들에게, 때로는 어른에게까지도 공감을 이끌어내며 감동을 선사한다. 특히 <주토피아>를 기점으로 이 사회가 갖고 있는 문제점들을 우화로 풀어내면서 디즈니는 단순한 '애들 영화'가 아닌, '어른들에게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의미 있는 작품'을 만드는 곳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모든 디즈니 영화에는 교훈이 담겨있다. 전작 <코코>를 통해 우리가 반드시 마주쳐야 할 '죽음'을 포용하는 법을 디즈니만의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가족이라는 존재를 통해 어려움을 극복해내는 법을 얘기했다면, <소울>은 <코코>보다는 조금 더 진중하고, 철학적이지만 특유의 유머를 잃지 않고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집중력 없고, 산만하고 금세 흥미를 잃는 어린이 관객들을 사로잡는 법은 무엇일까? 바로 아이들의 시선으로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디즈니 영화들의 주인공은 대부분 어린 아이다. 어린이들이 화면 속의 알 수 없는 누군가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고 영화를 이해하기 시작하는 순간, 아이들의 몰입은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그러나 <소울>의 주인공은 우리의 예상과는 조금, 아니 아주 많이 다르다.


중년 아저씨, 재즈 뮤지션, 콧수염. 어린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요소들을 모조리 배제하고, 심지어 어른들도 호감을 갖고 접근하기 힘든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소울>은 시작된다. 굳이 흥행성을 포기하고, 어린이 대신 어른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디즈니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일까?


바로 어른들의 공감을 끌어내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생판 처음 보는 조에게 기시감이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의 삶 또한 그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재즈 뮤지션이 되고 싶었지만 학교 밴드 선생님으로 일하는 주인공 '조'처럼, 우리 역시 꿈을 좇아 살던 시절이 있지만 결국 현실에 부딪힌 채 적당히 타협하며 하루를 살아간다. <소울>은 삶에 지친 어른들을 위한 위로이자,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목적을 잃고 방황하는 모두를 위한 영화다.     

듣기 싫은 불협화음으로 가득한 밴드의 연주로 영화는 시작된다. 재즈를 사랑하는 조는 그토록 원하던 꿈 대신 학교 밴드의 시간제 교사로 일하고 있다. 이런 그에게 평생의 꿈이었던 도로테아 윌리암스와 무대를 함께 설 수 있는 황금 같은 기회가 찾아온다. 드디어 자신에게도 일생일대의 순간이 찾아왔다고 생각한 조는 흠뻑 분위기에 취해 차에 치일뻔하기도 하고, 공사장에서 떨어지는 벽돌을 아슬아슬하게 피하기도 한다.    


평소의 디즈니 영화라면 그저 개그 씬으로 지나칠만한 장면이지만, 영화의 주제를 이미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서인지 유독 폭력적이고, 현실적으로 느껴졌던 장면이다. 죽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일상적인 것인지 보여주는 이 장면은, 삶과 죽음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닌, 우리의 죽음까지도 삶의 일부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죽음은 인생에서 가장 기쁜 순간에 닥쳐오지 않는다. 그저 우리와 항상 같이 있을 뿐이다. <코코>와 달리 조금 더 무거운 얘기를 하고 있는 <소울>은, 죽음이라는 소재를 마냥 재미있고 유머러스하게 풀어내지 않는다. 불의의 사고로 저승길에 떨어진 조의 모습을 보여주며 이 이야기는 이제야 시작이라는 듯, 영화의 메인타이틀이 떠오른다.


죽음의 세계는 무서울 정도로 침착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영혼들은 아무 생각 없이 계단의 끝을 향해 걸어가고, '신'같은 존재들인 '제리'들은 감정이 없는 AI의 목소리처럼 따스하지만, 무언가 결여되어 있는 이질적인 느낌을 준다. 제리라는 존재들을 보면 바로, 우리가 죽음에 대해 갖고 있는 감정들이 떠오른다. 익숙하지만 어딘가 거부감이 들고, 내 모든 것을 알지만 가까워지고 싶지는 않은 존재. 디즈니가 그려낸 죽음의 모습은 이렇다.

어떻게든 지구로 돌아가기 위해 발버둥 치다 영혼 22호를 만난 조는 22호의 마지막 불꽃을 채워주고 그 대가로 지구로 돌아갈 수 있는 통행증을 받기로 하고, 22호에게 삶의 목적을 채워주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사실 여기서부터 이미 이 영화의 교훈을 단정 지었을 (필자처럼) 관객들이 있었을 것이다. '모두에게 삶의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을 향하다 보면 우리의 인생은 풍요로워지고, 살만하다고 느끼게 된다'라는 식의 교훈을 예상하며 이들의 여정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우여곡절 끝에 지구로 돌아갔지만, 고양이와 영혼이 뒤바뀐 조는 그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인생의 기회를 붙잡기 위해 자신의 몸에 들어간 영혼 22호와 같이 움직이기로 한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22호의 돌발행동은 조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한다. 그에겐 매번 똑같고,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그의 삶은 생각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었고, 꿈을 접은 채 현실을 살아가는 인물은 조 혼자가 아니었다.


모두가 꿈을 이루지는 못하지만, 지금의 주어진 삶에서 충분히 행복을 느끼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조는 그렇게 깨달음을 얻기 시작한다. 영화는 누구보다 간절히 살고 싶어 하는 조와, 살고 싶지 않은 22호의 상반된 모습을 통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화두를 던진다. 나에게는 당연했던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엄청난 기쁨이라는 것을 깨달은 조는, 무대에 서는 것 같이 자신의 꿈을 이루는데서 느끼는 행복만이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맛있는 파이를 먹는 것, 바다를 느끼는 것, 계절의 변화를 보는 것처럼 소소한 행복의 파편들이 모여 인생이라는 큰 그림을 완성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삶에 목적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삶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삶. 지금 이 순간 느끼는 감정, 만나는 사람, 작은 행복을 즐기고 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 이것이 내가 이해한 <소울>이 말하고자 하는 '가치'이다. 사실 모든 디즈니 영화에는 교훈이 있다고 말했지만, <소울>을 올바르게 감상하는 법은 어떤 틀이나 한 줄짜리 교훈으로 이 영화를 이해하고, 재단하지 않는 것이다.

22호가 자신의 생각을 뒤엎고 살아보기로 결심한 것처럼, 누군가에게는 도전하는 삶이 가치 있다는 교훈일 수도 있고, 끝까지 꿈을 포기하지 않은 조처럼 자신의 목표를 향해 전진하라는 교훈이 될 수도 있다. 단순하게 해석하기엔 <소울>이 던지는 주제는 훨씬 깊고, 무겁다. 지금 각자가 처한 문제에 따라 영화 <소울>이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다르게 해석될 것이다.


인트로의 불협화음 가득한 밴드 연주처럼, 우리의 인생은 순리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부딪히고 깨지고, 때로는 코니처럼 연주를 그만두고 싶어지는 순간도 있지만 그래도 '그만두겠다'는 말을 꾹 참고 제자리로 돌아오는 이유는, 우리 모두 이 연주의 끝을 듣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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