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더맨:노 웨이 홈을 보고
모든 것이 빨라진 시대다. 생산도 빠르고, 소비도 빠르다. 어제 누군가가 만들어낸 제품이 유행에 뒤쳐지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는다. 쉴 틈 없이 새로운 물건이 시장을 대체하는 이럴 때일수록 클래식의 변하지 않는 가치는 더 돋보이기 마련이다.
단순히 한 시대를 풍미하는 작품이 아니라, 몇 세대를 거쳐서도 변함없이 사랑받는 작품들이 있다. 지금 떠오르는 작품이라고 한다면,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 같은 판타지 영화나 <스타워즈>, <스타트랙> 같이 각 장르의 역사를, 하나의 문화를 대변하는 작품들이 있다. 제목만 들어도 영화의 메인 테마가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재생이 되고, 낯선 이가 그 영화를 좋아한다는 사실만으로 문화적 유대감을 느끼게 하는 영화들. 이런 영화들의 가치는 과거의 향수와 뒤섞일 때 더욱더 깊어진다.
토비 맥과이어의 스파이더맨을 만난 건 아마 초등학생 시절 영어학원에서였던 것 같다. 우리들은 아마 얼마 남지 않은 방학을 앞두고 설레는 마음에 수업이 따분하기만 했고, 선생님의 교육적인 해결책은 바로 영화였다. 샌드맨이 누군지, 베놈과 스파이더맨이 왜 싸우는지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하늘을 활공하고, 악당들과 맞서 싸우는 스파이더맨을 보고 아이들은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스파이더맨과의 첫 만남이었다.
앤드류 가필드의 스파이더맨은 낯선 땅에서 만났다. 필리핀에 살기 시작한 지 한 달 정도 됐을까, 영화관에서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를 볼 기회가 생겼고 영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탓에 영화의 내용을 이해나 했는지도 모르겠다. 토비의 스파이더맨의 비해 앤드류의 스파이더맨은 좀 더 하이틴 무비의 주인공스러운 능글맞음과, '쿨함'이 가미된 캐릭터였다. 어렸을 때 만난 토비의 스파이더맨이 누구나 한 번쯤 떠올려봤을 영웅의 모습이었다면, 앤드류의 그것은 조금은 노력하면 닿을 수 있을 것 같은, 하지만 결코 닿을 수 없는 거리에 있는 선망의 대상과도 같았다.
그렇게 두 스파이더맨을 흘려보내고 성인이 되어서야 마침내 톰 홀랜드의 스파이더맨을 만났다. 톰 홀랜드의 스파이더맨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불완전성'이다. 앞선 두 스파이더맨들보다 훨씬 앳되고, 소중한 사람들을 훨씬 더 많이 떠나보내야 했던 영웅. 누구보다 더 아픈 성장통을 겪어야만 했던 소년. <홈커밍>과 <파 프롬 홈>을 지나 마침내 <노 웨이 홈>으로 마무리된 톰 홀랜드의 스파이더맨 3부작은 그 어떤 스파이더맨이 겪은 고통보다 가장 고통스럽고, 잔혹하다.
스토리의 개연성이나 스파이더맨이 마주한 윤리적인 논제는 팬들의 몫이다. 중요한 건 소중한 사람들, 재정적인 지원 등 모든 것을 잃고 난 후에야 비로소 스파이더맨이 우리가 알던 스파이더맨으로 돌아왔다는 점이다.
‘좋은 이웃 스파이더맨’이라는 별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스파이더맨의 정체성은 서민형 영웅이라는 캐릭터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가난하고, 이렇다 할 지원도 없이 쫄쫄이 슈트 하나만 입은 혈혈단신으로 악에 맞서는 모습은 그래서 더 처량했고, 더 애절하게 다가왔다. 사실 스파이더맨이 MCU 유니버스에 본격적으로 합류하면서 스파이더맨을 탄생시키는 중요한 변곡점인 벤 삼촌의 죽음이 생략되고, 그 빈자리를 아이언맨이 채우면서 우리가 알던 스파이더맨과 조금은 괴리감이 있는 모습이 완성됐다.
토비의 찌질함과, 앤드류의 성장통 대신 톰의 스파이더맨은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풍요로웠다. 그리고 <노 웨이 홈>이 개봉했다. <노 웨이 홈>의 스파이더맨은 역대 시리즈 중 가장 비참하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두 잃고, 모든 지위와 명성을 내려놓은 스파이더맨은 다시 맨 몸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 역대 스파이더맨 시리즈 중 가장 비참한 결말이지만, 희망을 느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우리가 알던 스파이더맨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왔기 때문이다. 오랜 팬이라면 향수를, 새로 유입된 팬이라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스파이더맨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남기고 영화는 막을 내린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가치를 지닌 시리즈만이 할 수 있는 스토리이자 결말. 이렇게 스파이더맨은 비로소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