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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혁 Mar 22. 2022

답을 알고 나면 허무해지는 수수께끼처럼

영화 <더 배트맨> 리뷰

이상한 데서 고집이 센 편이다. 바지는 무조건 다리 꼬기 편한 조거 팬츠, 힙합은 켄드릭 라마, 아이스크림은 딸기 요거트, 최고의 배트맨 영화는 <다크 나이트>. 이런 나에게 크리스찬 베일의 뒤를 이은 차세대 배트맨으로 로버트 패틴슨이 낙점됐다는 소식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여기에 언급도 없는 벤 애플랙에게는 미안하지만)


한때 10 소녀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영화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치명적인 뱀파이어, 에드워드와 어둡고 우울하고 고뇌에 빠져있는 히어로, 배트맨. 극과 극으로 느껴졌던 둘의 조합은 머릿속으로  번이고 시뮬레이션을 돌려도 결과는  실패였다. 가끔은 걷기 전에 뛰어봐야 안다는 아이언맨의 말대로, 걱정과 기대를 안고 < 배트맨> 관람했다.


우선 결론부터 말하자면 <더 배트맨>은 2억 달러나 쏟아부은 블록버스터 대작이지만, 영화의 연출 방식은 기존의 블록버스터 히어로 영화들과는 조금 결이 다르다. 시원시원하고 거침없이 진행되는, 우리가 익숙하게 봐 온 마블 유니버스의 영화들보다는 달리 DC 유니버스 특유의 어두운 분위기가 더 부각이 된 편이다. 이야기를 진행하는 과정도 묵직하다.

영웅의 평화로운 일상을 소개하고, 그 일상을 파괴하는 빌런을 등장시키고, 그 빌런과 정면으로 몇 번이고 맞서 싸우다가 결국에는 승리를 쟁취하는 익숙한 서사 대신 <더 배트맨>은 ‘리들러’라는 빌런을 배트맨보다 먼저 소개하고, 리들러가 남긴 단서들을 추적해 가며 실체를 파악하는 이야기 구성을 통해 히어로물 대신 마치 영화 <세븐> 같은 누아르 영화를 보는듯한 느낌을 준다. 실제로 리들러의 방을 발견하는 장면을 보면 <세븐>에서 본 것 같은 연출을 볼 수 있기도 하다.


또한 <퍼스트 어벤져>, <아이언맨>같이 슈퍼 히어로가 등장하는 시리즈의  영화는  영웅이 탄생하는 서사를 다룬다는 일종의 법칙을 깨부수는 스토리도 흥미롭다.


배트맨 하면 떠오르는, 어둠 속에서 괴한의 총에 맞은 어머니 마사 웨인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어둠과 대비되는 그녀의 새하얀 진주 목걸이가 흩날리는 장면은 바로 배트맨 하면 떠오르는 유명한 장면이자, 배트맨이라는 영웅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명장면이기도 하다.


자의나 우연히 초능력을 얻어서 탄생하는 영웅들과는 달리 배트맨이 탄생한 배경은 철저히 개인적이다. 대의를 지키기 위한 명분 대신 자신의 부모님을 죽인 ‘에게 복수하고,  나아가 고담이라는 도시의 ‘ 뿌리 뽑는 .


그래서 배트맨의 서사는  어떤 영웅보다 훨씬  어둡고, 슬프게 그려진다. 위대한 위인들의 이름 앞에는 ‘ 따라붙듯이 모든 슈퍼 히어로들에게는 각자를 상징하는 키워드가 하나씩 있다. 예를 들면 캡틴 아메리카의 ‘고결함’, 스파이더맨의 ‘이웃’,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 배트맨에게는 ‘복수’.

< 배트맨> 또한 이런 배트맨의 정체성을 ‘나는 복수다라는 대사를 통해 반복적으로 노출시킨다. 이런 배트맨에게 맞서는 빌런은 리들러, 고담의 부패한 이면을 시민들에게 폭로하고,  도시를 철저히 무너뜨리고 싶은 리들러의 존재는 전작 <조커> 떠오르기도 한다.


아버지의 유산과도 같은  도시를 지켜내고 싶은 배트맨, 희망 없는  도시를 떠나버리고 싶은 캣우먼, 그리고  도시를 철저히 몰락시키고 싶은 리들러. 영화는 크게   주인공의 시선으로 진행된다.


리들러의 수수께끼를 풀면 풀수록 점점 고담시의 어두운 이면, 브루스 웨인의 가정사, 고위층의 타락이라는 드러나는 스토리는 DC 코믹스가 자신 있고, 잘해왔던 서사이기도 하다.


이런 리들러의 수수께끼는 관객을 몰두하게 만드는 흥미로운 장치지만, 정작 답을 알아내면 허무한 그의 말장난처럼, 영화의 메인 빌런인 리들러의 정체를 알아내는 순간부터 영화의 재미는 급감하기 시작한다.

고담이라는 부패한 도시를 재건하려는 신념이 굳건한 철학적인 악당에서, 브루스 웨인을 향한 열등감에 찌들어 있는 인터넷의 키보드 워리어로 그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 극의 흐름을 이끌어가던 리들러는 배트맨을 각성시키는 삼류 악당으로 전락한다. 자신의 치부가 드러날까 봐 비밀을 숨기는 고위직들과 배트맨 사이의 치밀한 심리전과, 리들러라는 빌런의 특성을 십분 활용한 전반부와 달리 후반부는 배트맨의 평범한 성장 스토리로 마무리된다.


물론  와중에도 건질 장면은 있었다. 어둠 속에서 악을 소탕하는 대신 스스로 빛이 되어 시민들의 앞을 책임지는 장면은 나름대로 의미도, 영화의 메시지도  담아낸 명장면이지만  외에는 사실 이렇다  알맹이가 없다. 리들러라는 빌런을 통해 많은 것을 얘기하고 싶었지만 치밀하고 꼼꼼하게 진행되는 영화의 전반부와는 달리 결말은  엉성하다는 느낌을 지울  없었다.


그래도 앞으로 기대는 된다. 로버트 패틴슨이 어떻게 배트맨이라는 왕관의 무게를 견뎌내고, 역사에 남을 만한 배트맨이 될 수 있을지. 아직 부족하지만 그 가능성을 충분히 봤던 시작, 영화 <더 배트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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