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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혁 May 05. 2022

그립기엔 좀 미묘한

제2회 오뚜기 푸드 에세이 공모전 참가작

2014년부터 2019년. 그러니까 고등학교 2학년부터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필리핀에서 보낸 지난 5년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음식을 꼽으라면 아마 ‘치킨 앤 라이스’ 일 것이다.


밥과 치킨. 직관적인 이름만큼이나 만드는 과정도 직관적인 음식이다. 복잡한 조리과정 대신 후라이드 치킨과 밥을 한 그릇에 올려놓으면 요리의 완성이다. 어떤 쌀을 쓰고, 치킨을 어떻게 튀길지, 셰프의 심도 깊은 고민은 그다지 필요해 보이지 않는다. 왜 그렇냐고 묻는다면, 치킨 앤 라이스는 원래 그런 음식이기 때문이라는 대답밖에 드릴 수가 없다. 비하가 아니다. 어디에나 있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음식, 치킨 앤 라이스는 그런 음식이다.


이렇게 간단한 음식 하나 때문에 전 세계에 황금 아치를 꽂아 넣고 있는 맥도널드가 필리핀에서만큼은 로컬 브랜드인 ‘졸리비’에 밀려 이인자 신세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렇게 물렁해 보이지만은 않는 음식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그렇게 인기가 많은 음식인가, 생각했을 때는 대답을 주저하게 된다. 그렇게 찾아 먹지는 않지만 없다면 섭섭해지는, 치킨 앤 라이스는 그런 묘한 음식이다.


치킨 앤 라이스의 선두주자 같았던 졸리비의 뒤를 이어 이제는 내로라하는 세계적인 브랜드들도 전부 슬금슬금 치킨 앤 라이스를 메뉴판에 끼워 넣었다. 브랜드의 현지화가 왜 중요한지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KFC건, 맥도널드 건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이제는 치킨 앤 라이스를 메뉴판의 가장 메인에 걸고 있다.


이렇게 이제는 어느 패스트푸드점에서나 만날 수 있는 음식이지만 우리 동네 근처에는 KFC보다 인기가 많았던 한 허름한 식당이 있었다. 대담하게도 그 식당의 이름은 앞의 알파벳 하나만 바꾼 ‘J’FC였다. 앞선 J가 뭐의 약자였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Jumbo였을 수도 있고, 어쩌면 Junior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기억에 남는 건 이상하리만큼 항상 손님이 와글와글했다는 것이었다. 점심시간은 물론 아침부터 사람들이 많았던 그 식당의 비결은 간단했다. 밥 한 덩이와 치킨 한 조각에 500원. 대기업의 자본으로는 절대 꿈도 꿀 수 없는 기적 같은 가격을 그 식당에서는 몇 년간 해오고 있었다.


물론 맛은 딱 500원어치였다. 대한민국에서 커피값이나 다른 음식 값이 오르는 건 몰라도, 공깃밥이 2천 원이 되는 순간 나라가 망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우리나라나, 필리핀이나 밥에 대한 마음은 진심이다. 아무리 오랜 연구를 통해 더 바삭하고, 더 육즙이 풍부한 치킨을 개발하고 더 맛있는 밥을 짓기 위해 노력해도 결국 가격은 어쩔 수 없는 문제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치킨 앤 라이스는 다양하게 커스터마이징이 가능한 음식이기도 하다. 치킨 대신 바비큐를 넣으면 바비큐 앤 라이스, 돼지고기를 넣으면 포크 앤 라이스가 된다. 말장난 같아 보이지만 정말로 모두 있는 음식들이다. 동양의 대표음식인 쌀과 서양의 음식인 치킨. 이 둘이 한 접시에 올라갔다는 점만 봐도 치킨 앤 라이스는 그 뿌리부터 커스터마이징인 음식이다.


단백질의 치킨, 탄수화물의 밥. 영양학적으로도 썩 괜찮아 보이는 이 음식은 대학교 시절 내 저녁을 책임지는 메뉴 중 하나였다. 아무리 필리핀의 물가가 싸다고 한들 우리 가족의 주머니 사정도 그렇게 썩 좋지만은 않았다. 학교 근처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 중에 가격도 괜찮고, 필리핀 음식 중에서 그나마 한국스러운 입맛에 가까운 음식은 바로 치킨 앤 라이스였다.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치킨에만 뿌렸던 양념 치킨 소스를 밥에도 뿌리기 시작했다. 필리핀 친구들과 같이 먹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먹는 방법을 따라 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후라이드 치킨만 있는 줄 알았는데 점점 치킨의 종류도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마늘치킨, 레몬치킨, 간장치킨. 어딘가 익숙한 맛이 느껴지는 치킨들이 점점 메뉴판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한국식 치킨의 세계화인지, 아니면 맛에 대한 보편적인 기준인지는 모르겠지만 점점 치킨 앤 라이스는 내 기준으로는 그 어디 나라에 속하지 않은 음식이 되었다.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 얼마 전 유행했던 ‘치밥’처럼 후라이드 치킨에 햇반을 함께 해 먹으면 그만이다. 오랜만에 옛 생각을 떠올리며 야심 차게 준비했지만 맛은 어딘가 다르다. 당연하다. 재료도, 요리법도 다른 음식들을 합쳐봐야 그 맛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신기하게도 별 다른 아쉬움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가끔씩 생각나지만 그렇다고 다시 돌아가고 싶냐는 질문에 머뭇거리게 되는, 치킨 앤 라이스는 그런 음식이다. 아무리 좋은 기억만 뽑아 억지로 우겨내도 그때의 감정이 떠오르지 않는 것처럼, 어쩌면 추억 속 음식은 정말로 추억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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