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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혁 Apr 10. 2022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

영화 <메기>

어렸을 적 우리 집에는 TV가 없었다. 대신 외할머니 집에는 두꺼운 브라운관 TV 하나가 놓여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시력이 더 떨어지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의 화질에, 채널도 몇 개 없었지만, 그래도 그것마저 우리에게는 감지덕지였다. 그때 봤던 프로그램 중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방영되고 있는 한 예능 프로가 있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라는 이 예능은 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이야기가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아맞히는 아주 간단한 형식의 프로그램이었다. 이야기가 끝나고 뒤늦게 공개되는 정답을 보고 싶어서 급한 화장실도 참고 열심히 봤던 기억이 난다. 


한 가지 신기했던 건, 아무리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처럼 들려도 '진실'이라고 판명 나는 순간 모든 것이 믿겼고, 반대로 아무리 그럴듯한 이야기여도 '거짓'이라고 드러나는 순간 내가 믿었던 모든 것들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거짓으로 느껴졌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야기의 진실을 알고 싶다는 호기심보다는, 내가 내린 믿음의 대가가 정답이었는지 확인해 보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인간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저지르는 죄, 바로 '거짓말'이다. 찾아보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이것도 내가 방금 지어낸 거짓말이니까. 하지만 그럴듯한 사실일지도 모른다. 혀 하나만 까딱하면 지을 수 있는 죄. 이 간편한 죄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 아담과 하와도 결국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으니 어쩌면 가장 강력한 죄일 수도 있겠다.


오늘의 영화 <메기>도 이런 진실과 거짓에 관한 이야기다. 한 가지 다른 점을 꼽자면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와는 달리 <메기>는 어떤 이야기가 진실이고, 또 어떤 이야기가 거짓인지 명확하게 결론을 지어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가 사는 인생 또한, 그렇듯이 말이다.                  

영화 <메기>의 영제는 'Catfish'가 아닌 'Maggie', 말 그대로 그냥 메기다. 별 의미는 없어 보이지만 창의력을 발휘하자면 사전적인 의미의 '메기'가 아닌 한 존재로서의 '메기'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이옥섭 감독의 작은 재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기>에는 크게 세 가지 이야기가 들어있다. 첫 번째 이야기는 '민망한' 엑스레이 사진이 공개된 후 갑자기 출근하지 않는 직원들을 찾아 나서는 부원장과 윤영의 이야기다.


직원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믿는 부원장을 친히 설득시켜주기 위해 윤영은 직원들의 집을 직접 찾아 나선다. 그리고 찾아간 한 집에서 직원이 쓰러져 있는 모습을 발견하곤, 그제야 사람이라는 존재를 믿어보기로 한다. 그러나 이런 이들의 신념을 비웃기라도 하듯 곧바로 두 번째 테스트가 시작된다. 사과를 깎다가 칼에 찔렸다는 병원을 찾아온 피투성이의 한 남자. 그의 말은 진실일까, 거짓일까?


믿음과 의심. 보통 믿음은 긍정적인 것, 의심은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된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신기하게도 모두가 이 두 개념을 이분법적인 사고로 인식하고 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이런 우리의 고정관념에 관한 이야기다. 사람을 믿었고, 결국 그 믿음이 옳았다는 걸 증명한 윤영은 아이러니하게도 피투성이로 병원을 찾아온 환자의 정체를 의심한다. 결국 그 의심의 대가는 옳은 선택이었고, 윤영은 의인으로 신문에 실리기까지 하지만 어딘가 찜찜하다. 왜냐하면 믿음과 의심은 옳고 그름의 잣대로 가려질 수 있는 행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이기에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누군가를 믿고, 또 누군가를 의심하는 건 신념이 아닌 선택이 되어야 하며, 그 누구도 이것을 비난할 자격은 없다. 선택의 대가가 어떤 것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야기는 윤영의 남자 친구, 성원의 이야기다. 윤영이 준 반지를 잃어버린 성원. 우연히도 그와 같이 일하는 동료의 발가락에서 '그 반지'를 발견한다. 그 반지는 과연 성원이 애타게 찾던 반지가 맞을까?


두 번째 이야기는 의심의 확장성에 관한 이야기다. 한 번 의심을 품는 순간, 인간은 그 구덩이를 계속 파게 된다. 구덩이 안에 갇혀있으면 눈앞에 보이는 건 당연히 구덩이의 흙밖에 없다. 그렇게 그 구덩이는 하나의 믿음이자, 신념이 된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동료의 발가락에 있던 그 반지는 성원의 것이 아님을 금방 알 수 있다. 하지만 의심은 시간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누군가를 믿는 것보다, 의심하는 것이 더 편하다. 믿음에는 근거가 필요하지만 의심에는 자신의 육감 하나면 충분하다. 남의 반지가 자신의 반지라고 확신했던 성원처럼, 의심은 참 쉽고 간단한 일이다. 자신이 보고 싶었던 것만 보고, 잘못된 의심을 가진 성원의 이야기를 통해 영화는 우리의 의심이 정당한 의심인지 먼저 의심해 봐야 한다고 말한다. 쉽게 말해, 의심을 의심하라는 말이다.                    

마지막 이야기는 또다시 시험대에 오른 윤영의 이야기다. 성원의 전 여자 친구로부터 성원의 충격적인 비밀을 알게 된 윤영. 과연 윤영은 이 이야기를 믿어야 할까, 믿지 말아야 할까?


세 번째 이야기는 의심의 편리함이다. 누구보다 서로를 의지했던 윤영과 성원의 관계는 타인의 말 한마디로 완전히 무너진다. 성원으로부터 데이트 폭력을 당했다는 전 여자 친구의 말을 듣고 윤영은 반지를 잃어버린 성원과 똑같이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기 시작한다. 얼굴도 몰랐던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자상한 남자 친구는 살인미수범으로 둔갑하고, 그를 향한 윤영의 믿음도 박살 난다. 


믿음을 쌓기 위해선 그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만, 의심은 단 몇 초면 충분하다. 앞서 말했듯이 확실한 근거도 필요 없다. 물론 가장 이상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은 당사자인 성원에게 직접 사실을 듣는 것이지만, 윤영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야 진실을 들으러 성원을 찾아간 윤영은 '전 여자 친구를 때린 적이 있냐'며 직구를 던지고, 성원은 '때린 적이 있다'라는 충격적인 대답을 한다. 영화는 이 대답을 마치고 싱크홀로 빠져버리는 성원의 모습을 보여주며 막을 내린다. 성원이 진짜로 데이트 폭력범인지, 무고한 사람인지는 우리는 알 수 있는 길이 없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은 진실의 전체가 아닌, 진실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지키기 위한 정당방위로 폭력을 휘두른 것일 수도 있고, 전 여자 친구의 과거를 보호하기 위해 내뱉은 선의의 거짓말일 수도 있지만 진실은 이미 구덩이에 빠져 버렸다. 마지막 장면은 어쩌면 진실을 듣고도 이미 스스로 거짓이라고 결론을 내버린 윤영의 머릿속을 상징적으로 비유하는 장면이거나, 아니면 진짜로 싱크홀에 빠진 성원의 모습일 수도, 어쩌면 둘 다 아닐 수도 있다. 영화는 마지막으로 관객에게 이 테스트를 넘긴다. 성원을 믿을 것인가, 의심할 것인가?                   

사실 무엇이 진실인지, 무엇이 거짓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그렇게 믿는 순간부터 진실은 거짓이 되고, 반대로 거짓은 진실이 된다. 그러니까 결국 의심도, 믿음도 우리 원하는 선, 딱 그 선에서만 멈춘다는 것이다. 우리의 선택은 오늘도 어김없이 심판대에 오른다. 오늘은 믿을 것인가, 믿지 않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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