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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혁 Apr 26. 2022

믿음의 대가는 불신이다

영화 <사바하> 리뷰

모태신앙. 내 믿음의 시작은 모태에서부터였다. 우리 집에서 일요일은 '일요일'이 아닌 '주일'이었다. 주일만 되면 교회 성가대로, 예배가 끝나고 나면 성경 공부반으로. 그렇게 교회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훌쩍 가있었다. 불편하거나 힘들다는 생각은 없었다. 단지 일요일 아침에 하는 재밌는 TV 프로그램을 보지 못한다는 것. 어린 마음엔 딱 그 정도가 아쉬울 뿐이었다. 마치 잘 짜인 훈련 스케줄을 습관처럼 소화해 내는 선수처럼, 종교는 내게 있어 하나의 루틴과도 같았다.  


모태신앙의 장점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다는 점이다.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 그냥 그렇게 하는 것. 여기에는 어떤 믿음이나 의심도 없다. 그러나 나에게는 당연한 것이, 남들에게는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 이 온도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과연 내가 지키고 있는 이 믿음의 대가는 무엇인가?' <사바하>는 종교를 한 번이라도 가진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품었을 그 의문, 그러나 섣불리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불편했던 그 의문에 관한 영화다. 우리가 지키고 있는 이 믿음, 이 믿음의 끝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장재현 감독의 전작 <검은 사제들>은 이 의문에 대해 '종교적으로 올바른' 답을 내놓는다. '굳건한 믿음으로 유혹에 흔들리지 말고 그 길을 걸어라.' 신학생 준호 (강동원)가 유혹과 의심에 흔들리다가 마침내 악을 마주하고 물리치는 것처럼, 인간은 굳건한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아주 희망찬 결말을 제시한다. 


그러나 <사바하>는 조금은 삐딱하게 이 질문을 받아들인다. 과연 우리가 믿고 있는 신, 또는 그 믿음이 어떻게 옳은지는 누가,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이것이 <사바하>가 <검은 사제들>과는 다른 지점이다.


<검은 사제들>을 상징하는 키워드가 '믿음'이라면, <사바하>는 '의심'이다. 우선 주인공 박웅재 목사부터 한없이 의심하는 인물이다. 사이비 종교 전문가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그는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데 집착하고, 거짓을 가려냄으로써 자신의 믿음을 확인하려고 한다. 


나한은 이런 박웅재 목사와는 달리 한없이 '믿는' 사람이다. 이런 그의 열렬한 믿음의 대상은 바로 동방교의 교주인 풍사 김제석. 그는 친 아버지를 살해한 자신을 거둬준 인생의 구원자와도 같은 인물이다. 나한에게 믿음은 삶의 이유와 마찬가지다. 아버지에게 구원을 받은 그는 믿음을 위해, 아버지를 위해 살인까지 서슴지 않는다. 아버지의 천적이라고 알려진 '그것'을 죽이기 위해 무고한 생명들을 살해하고, 죄책감에 시달리지만 그의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나한에게는 그것이 '믿음'이기 때문이다.                  

나한이 쫓고 있는 '그것'은 영화 내내 불길한 것으로만 묘사된다. 그것은 한 배에 있던 동생 '금화'의 다리를 뜯어먹으며 탄생했으며, 태어나는 날 염소들이 시끄럽게 울어댔다. 그것이 사는 주위에는 짐승들이 병에 걸려 쓰러진다. 그것은 마치 짐승처럼 털로 뒤덮여있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어둠 속에서만 지낸다. 듣기만 해도 괴이한 설정들과 어두운 음악들은 모두 '그것'이 모든 것의 원흉이자 시작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염소, 기이한 탄생, 그리고 털. 영화는 관객들이 불길한 상징들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들에 하나둘씩 반전을 주기 시작하며 이런 우리의 믿음을 뒤집어버린다. 먼저 그것의 털이 벗겨짐과 함께 이 반전은 시작된다. 악처럼 묘사됐던 '그것'이 새하얀 속살을 드러내며 나한에게 '진실'을 알려주고, 나한은 혼란에 빠진다.  


나한과 마찬가지로 관객은 선택을 내려야만 한다. 구원자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풍사 김제석과, 나한의 모든 과거를 알고 있는 듯한 '그것'. 과연 이 둘 중 정말로 따라야 하는 믿음, 혹은 신은 누구인가. 여기서 나한의 선택에 개입하는 큰 요소는 바로 '모성애'다. 나한이 어렸을 적 들었던 엄마의 자장가를 똑같이 따라 부르는 '그것'. 그 노랫소리에 나한이 조금이나마 품고 있던 믿음에 대한 의심은 확신이 된다.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찾아왔다고 믿은 아버지가, 사실은 자신의 영생을 위해 자신을 포함한 아들들을 또 다른 살인자로 만들었다는 진실이 수면 위로 드러나며 나한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나한이 무고한 타인의 생명을 빼앗으면서까지 지켰던 믿음. 그 굳건한 믿음의 대가는 결국 파멸이었다. 우리가 내리는 모든 선택의 결말이 항상 해피엔딩은 아닌 것처럼, 우리가 가진 이 믿음의 결과 또한 구원이 아닐 수 있다고 영화는 말한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은 지금의 믿음이 참인지, 거짓인지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영화는 이 질문에도 확답을 내리지 못한다. 마치 관객들이 영화의 간단한 연출에 속아 '그것'을 당연히 악한 존재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현실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믿음에 속아 살인을 저질렀던 나한처럼 우리 또한 어쩌면 이 믿음에 속아 시간을 낭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믿음의 대가로 모든 것을 잃은 나한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자신의 의문에 대한 확답을 얻지 못한 채 방황하는 박웅재 목사의 독백에는 이런 인간의 한탄이 담겨있다. 


"어디 계시나이까? 우리를 잊으셨나이까? 어찌하여 당신의 얼굴을 가리시고 그렇게 울고만 계시나이까? 깨어나소서. 저희의 울음과 탄식을 들어주소서. 일어나소서. 당신의 인자함으로 우리를 악으로부터 구하시고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사바하>는 나약한 인간뿐만 아니라 '신'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 속 등장하는 신과 같은 초월적 존재들, '그것'이나 풍사 김제석은 직접 움직이지 않는다. 대신 자신의 추종자들을 시켜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바를 이루려고 하는 수동적인 모습을 보인다. 오히려 신보다 낮은 존재인 인간들이야말로 능동적으로 자신의 믿음을 수행하고, 신을 향해 쫓아가는 모습을 보인다. 


인간은 부르짖고, 신은 침묵을 지킨다. 현실은 영화와 다르다. 신은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직 인간들만이 자신만의 잣대로 종교를 해석하고, 자신의 믿음만이 참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단지 불길하고, 털로 뒤덮인 추악한 모습을 했다는 이유로 참이었던 '그것'을 당연히 악이라고 예단했던 우리처럼 말이다.  


사실 종교의 교리를 떠나  '믿음'이라는 모든 종교의 본질은 같다. 신은 말한다. 의심 대신 믿음으로 구원을 받으라고. 인간들은 항변한다. 나약하고 아둔한 한 명의 인간이 참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냐고, 그렇지 않다면 왜 신은 직접 목소리를 내지 않냐고 말이다.


나한의 맹목적인 믿음과 박웅재 목사의 냉정한 의심, 그 어디에도 이 의문에 대한 정답은 없다. 우리가 가진 이 믿음의 대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영화, <사바하>였다.  


P.S 더 많은 영화 이야기는 여기서 만나볼 수 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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