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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혁 May 09. 2022

살고 싶다는 욕망

영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리뷰

삶의 의지가 떨어질 때 습관처럼 보는 영화들이 몇 편 있다. 주로 조셉 고든 래빗의 <50/50>이나 <버킷 리스트> 같은 류의 영화들이 대부분이다. <50/50>의 자동차 독백 씬이나, <버킷 리스트>의 마지막 히말라야 등반 장면을 보고 눈물을 쏙 빼고 나면 '아, 그래도 내 인생은 살만하군. 후련하다.' 이런 식으로 위안을 얻곤 한다. 미안하지만 영화를 만든 감독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철저히 영화를 기능적 역할로만 소비하는 셈이다.   


죽음, 특히 시한부라는 클리셰를 다루는 영화들은 대부분 이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평범하지만 나름대로의 소중한 일상을 살아가는 선한 주인공. 시한부 진단을 받고 파괴되는 그의 일상. 매일이 똑같다고만 생각했던 일상의 소중함을 깨달은 후 다시 일상으로의 복귀 혹은 평안한 죽음. 대개 이런 식이다.  


오늘의 영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에도 역시 시한부가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론. 시작부터 로데오 경기장에서 섹스를 하는 강렬한 장면으로 등장하는 그는 우리가 지금까지 봐왔던 시한부들과는 다르다. 론은 카우보이다. 그는 에이즈 판명을 받은 후 가만히 앉아 죽음을 기다리는 대신, 미쳐 날뛰는 소위에서 목숨을 걸고 버티는 로데오 경기처럼 끈질기게 살아남기로 한다.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을 보는 시선은 크게 두 가지다. 영화 속 사건의 흐름을 론이라는 개인과 FDA라는 집단 사이의 갈등에 집중한다면 흔한 '사회 고발 영화'가 될 것이다. 반대로 론과 레이언, 또는 론을 포함한 에이즈 보균자들 사이의 관계에 집중한다면 '퀴어 영화'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사건들을 단순히 집단과 개인의 갈등, 규제와 생존이라는 한정된 시선으로만 바라보기엔 아깝다.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은 무엇보다 이해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생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저마다 옳다고 생각하는 생존 방식을 택한다. 에이즈 양성 판정을 받고 시한부가 된 론은 병원 대신 '스스로'를 믿는 자주적인 생존 방식을 택한다. 반대로 레이언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 혹은 약물에게 기대는 의존적인 생존 방식을 택한다.  


론의 생존 방식은 철저히 개인적이다. 그는 FDA라는 집단을 거부하고, 개인의 선택을 믿고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남기로 한다. 이 과정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론은 자신이 그토록 혐오했던 부류 - 동성애자들과 에이즈 보균자들과 같은 처지에 내몰린다. 

그들을 선입견의 시선으로 바라봤던 론은 하루아침에 자신이 바로 그 선입견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들과 같은 상황에 처한 지금, 비로소 그들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에이즈를 '호모들이나 걸리는 병'이라고 선입견을 갖고 있던 론은 에이즈에 걸리면서 '꼭 그런 것은 아니다'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육체노동자라는 마이너에서, 에이즈 보균자라는 마이너 중 마이너로 한순간에 신세가 바뀐 론은 그제야 자신이 깔봤던 이들을 돌아보게 된다. 


론은 생존을 위해, 자신이 비주류라고 무시했던 바로 그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기 시작한다. 론의 주위에는 이제 마이너들로 가득하다. 라틴계 병원 노동자에게 약을 몰래 조달받기도 하고, 게이인 레이언을 만나 같이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을 운영하고, 흑인 여성에게 그 클럽의 주된 업무를 맡기기도 한다. 


이전까지는 얘기를 나눠볼 생각도 하지 않았던 그들과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누게 되자, 그제야 론은 이들도 나와 그렇게 다를 것이 없는 '그저 살고 싶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시간이 흐르며 이런 론의 선입견이 달라지는 것처럼,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을 향한 론의 생각도 달라진다. 이 변화의 중심에는 바로 레이언의 죽음이 있다. 영화의 흐름이 변하는 중요한 장면이자, 아마 관객들이 기대하고 있는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이기도 하다.   

그러나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은 누군가의 죽음을 단순히 그동안 쌓아 올린 감정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지 않는다. 그저 담담하고 처연하게, 죽기 싫다며 울부짖는 레이언의 모습을 묵묵히 담아내는 카메라를 통해 이들도 우리와 똑같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나약한 존재라고 말한다. 


돈이 없으면 멤버십도 없다며 으름장을 놓던 론은 돈이 없어서 회원이 되지 못하는 남자를 위해 자신의 차를 팔아 돈을 마련한다. 이제 생존은 단순히 론의 개인적인 욕망이 아닌, 거대한 집단의 흐름으로 이어진다. '내'가 살기 위해 시작했던 일은 '우리'의 생존으로 이어지고 사람들을 돈벌이로만 이용했던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은 하나의 거대한 연대의 장으로 이어진다. 


론은 새로운 약을 구하기 위해 찾아간 곳에서 만났던 나비 떼처럼, 만지면 부스러져 버릴 것만 같은 '나비'들, 자신과 같이 살고 싶은 처지의 사람들을 포용하기로 결심한다. 론의 욕망은 그렇게 개인의 생존에서 집단의 생존이라는 한 차원 더 높은 성숙한 욕망으로 성장한다. 

<모가디슈>가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 속에서 이념을 뛰어넘어 생존이라는 목표를 향해 질주하는 이들의 이야기라면,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은 생존을 위해 차별과 편견을 뛰어넘어 생존이라는 본능으로 연대할 수 있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로데오처럼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위태로운 일상에서도, 론은 말한다. You enjoy your life, little lady. You only got one. 네 인생을 즐기라구, 한 번뿐인 네 인생을 말이야.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드디어 서로를 이해한 이 사람들. 그러나 목숨이 위협받는 처지가 되어서야 비로소 이해가 가능한 우리들의 현실을 담아낸 것 같기도 해 어딘가 모르게 텁텁한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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