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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인혁 Dec 06. 2021

르-르네상스 : 다시, 인간으로

프롤로그

신을 믿는 인간이 인간을 모서리로 내쫓았다. 중세시대의 암흑기, 세상의 중심은 인간이 아니었다.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다시 인간이 중심이었던 그리스-로마 시대의 것들을 되짚어보고, 그 안에서 사람다운 것들을 생각했다.

그렇게 사람이 중심이었던 세상에서, 한번 더 인간은 자신들을 스스로 세상의 모서리로 내쫓았다. 이 세상은 더는 인간이 중심이 아니다. 돈이 중심이고, 힘이 중심이며 권력이 중심이고, 인터넷이 중심이다.

산업 혁명 이후, 우리의 시간은 곧 노동력이 되었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시급이 정해진다. 자신의 시간을 바친 댓가로 돈을 받는다. 자본주의 사회에 자본이 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끼쳐간다. 미디어와 돈, SNS와 돈. 정경유착이나 정언유착, SNS로 인한 우울증은 예삿말이 되었다.


사람들이 서로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엔터테인먼트를 즐기는 시간까지. 삶의 모든 시간 속에 우리는 주인공이 될 수 없다. 우리는 메신저 없이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만남도 아니고, 전화도 아닌, 오직 문자로 소통하는 메신저는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너무나도 많은 잡음과 쓰고 읽는다는 해석 방식 때문에 얕고 넓은, 헛도는 커뮤니케이션이 될 수밖에 없다. 인간 고유의 복잡한 감정표현도 이모티콘에 의지하게 되었다. 그렇게 이모티콘이 선택해 둔 특정한 감정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에 익숙해진 우리는 솔직한 감정표현에 어려움을 겪는다. 우리의 감정은 인류가 탄생하고 지금까지의 시간 중, 그 어느 때보다도 가볍고 피상적이다.


일상을 공유하자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SNS는 목적이 전도되어, 우리의 일상을 종속하기에 이르른다. 한 사람이 갖는 인간관계를 절대적인 수치로 표현한 순간부터 SNS의 순수한 목적성을 잃게 되었다. 우리는 팔로워 수가 하나라도 줄어들면 초조해하거나, 좋아요를 받지 못하면 불안해한다. 정도의 관계는 숫자로 치부되었다. 좋음이라는 스펙트럼적인 감정은 좋아요라는 버튼으로 표현되는 흑백 감정이 되었다. 아날로그인 삶을 디지털에 표현하면서 생겨난 오류들. 우리는 그 오류와 함께 살아간다.


2지에서 3지는 0년이 걸렸고, 4지에서 5지는 0년이 걸렸다. 더욱 빨라지는 인터넷의 속도는 우리에게 영상 콘텐츠를 자유롭게 시청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거대 방송사들과 수많은 개인이 영상을 찍어내기 시작했다. 독립적이고 다양한, 새로운 시도도 마주할 수 있지만, 결국 숏폼 콘텐츠에 잠식당해갔다.

거대 자본을 앞세운 제작사와 방송사들은 우리의 말초신경을 자극하기로 했다. 과거에도 성적이 좋았던, 클리셰와 비주얼중심적인 기술력을 융합하여 만들어낸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영상산업의 주류를 이룬다. 생각하지 않고 편안하게 감상하는 방식에 익숙해진 우리였다. 영화 속의 상징과 의미를 파악하는 방법을 잊은 우리가 되었다. 더욱 자극적이고 가벼운 콘텐츠를 향한다. 그렇게 우리의 입맛에 맞는 숏폼 콘텐츠가 성행하게 되었다.

이런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콘텐츠들은 OTT의 플랫폼 아래 더 활기를 띤다. 알고리즘을 통한 추천 영상 시스템은 우리를 플랫폼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묶는다. 그렇게 우리의 시간을 빼앗는다. 당신이 좋아하는 영화와 비슷한 장르나 비슷한 내용만을 계속해서 보여준다. 그렇게 우리는 다양성의 시대에서 다양성의 반대로 흘러간다. 당신을 당신이라는 틀에 박아버린 알고리즘이다.

나아가, 선택하는 법을 잊은 우리에게 선택장애는 만성질환이 되었다. 추천 리스트가 없으면, 무엇을 볼지 고민하다가 시간을 다 날려버리기도 한다.


사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진짜 사람과의 커뮤니케이션이다. 메신져의 원형은 대화이고, SNS의 원형은 우리의 삶이다. 초점 없는 눈으로 응시하는 영상들도 결국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많은 사람들은 메타버스나 가상현실 기술이 발달하며 관광 산업은 쇄퇴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방송을 통한 정보의 교류가 늘어날수록 관광객들은 오히려 늘어났다. 눈으로만 보던 화면 속 장소를 실제로 가보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그 안에서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아름다운 풍경을 맞이했을 때. 거대한 건물의 빛나는 창문과 따스한 햇살, 그 사이를 채워주는 바람들. 화면 밖의 사람과 대화를 할 때 느껴지는 미세한 떨림과 온기가 흐르는 분위기. 가짜는 진짜를 따라잡을 수 없다.

그 안에서 만족하지 못함을 알 테다. 그럼에도 다른 방법을 찾기 어렵기에 계속해서 그 안의 세계로 들어가고자 한다. 욕망은 커져가고, 동시에 채울 수 없는 속은 허해져간다. 사람이 밀려나기에 이른다.


어떻게 이뤄낸 르네상스였던가. 천 년을 두 번 보내고서 얻은 르네상스였다. 하지만 두 세기도 채 못가고 힘을 잃었다. 얼마나 힘들게 얻은 세상의 중심이었고, 얼마나 쉽게 밀려난 인간이었는가.

우리의 편의를 위해 만든 기술에, 우리는 종속되어 간다. 눈 앞의 편안함에 생각하는 법을 잊거나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법을 잊어간다. 인간들은 자신들을 다시 세상의 모서리로, 스스로 쫓아내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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