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가장 사랑하게 되는 모습이 가장 짜증나는 모습이 되는 이유
인간관계에 있어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변함없음, 한결같음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이 나를 사랑해 주고, 신뢰를 깨뜨리지 않도록 행동하고, 책임감을 보여주는 것,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선호하고 함께하길 기대합니다. 변함없음이란 신뢰와 안정성의 또다른 이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일관성에 곧잘 싫증을 내기도 합니다. 찌개를 좋아라 하는 사람도 매일 찌개만 먹는 것은 싫어하듯이, 우리가 좋아라 했던 일관성도과 익숙함도 어느 시점에서는 예측가능함으로 인해 뻔하고 지루하고 재미없는 것으로 변질되어 버리고 맙니다.
내가 가장 사랑했던 그 사람의 모습이 때로는 가장 싫어하는 모습이더라.
제가 아는 어떤 남자는 성실하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남자는 퇴근하면 언제나 집으로 직행! 항상 가정에 충실하고, 아이와 아내와 시간 보내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는 분이었죠. 한눈을 파는 법이 절대로 없습니다. 보통 배우자에게 있어 이런 면은 참으로 바람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인은 놀랍게도 남자의 이 모습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습니다. 한 때는 그 성실한 면이 좋아 그 사람과의 결혼을 진지하게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제발 다른 남자들처럼 친구들 만나는 거 좋아라 하고, 술도 좀 마시고, 혼자서라도 놀러 좀 다니고 했으면 좋겠어!"
누군가가 가장 싫어하는 어떤 모습은 그가 가장 사랑하던 바로 그 모습이다
이렇게 어떤 이의 변함없는 모습은 아이러니하게도 다툼의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의 비밀은 바로 '사고 편향성'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상대방이 어떤 이야기를 시작하면 그 다음 얘기가 무엇일지 이미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표현들이나 생각의 흐름은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에 익숙해 지고 나면 그 사람의 말 하나하나, 행동 하나하나가 다 예상이 되는 겁니다. 이런 예측 가능성은 익숙함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지루함과도 같은 것입니다. 들어봐야 뻔한 거니까요.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상대의 말을 자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안봐도 드라마지...'
'그건 다 알겠고, 그래서 결론이 뭐야?'
그런데 이 익숙함이 서로에 대한 분노나 불신으로 점화가 될 때가 있습니다. 바로 상대방이 내가 듣기 싫어하는 얘기를 시작하고 있을 경우입니다. 잔소리가 대표적인 예겠죠. 매일 듣는 이야기지만 귓등으로 흘려보내는게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특히 본인을 추궁하거나 심문하는 듯한 느낌의 이야기는 대화의 시작 지점부터 짜증이 배가됩니다. 알겠으니까 그만하라는 마음이 가득. 그런데 계속 그 얘기들을 전개하게 되면, 이야기가 멀리 가기도 전에 스트레스는 이미 극에 달해져 있습니다. 게다가 구간반복하듯 나를 짜증나게 하는 부분을 집중해서 반복해서 말하는 사람들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입장을 바꿔 그 익숙함의 타겟을 자신으로 돌리면 상황은 완전히 역설적으로 돌변합니다. 누군가로부터 "이런 좀은 고쳤으면 좋겠어. 이런건 좀 개선하는게 좋겠는데?" 하는 소리는 지독히도 싫어합니다. 우리는 남한테 그런 소리를 잘 하면서 말이죠. 이렇듯 상대방의 일관성이 우리를 짜증나게 하지만, 동시에 우리 자신은 그 익숙함을 대단히 지향하는 모순을 띄고 있습니다. 상대에 대해서는 변화를 원하지만, 나에 대해서는 거부하지요. 결국 이런 각자의 모습은 어떤 형국으로 이어질까요?
"변했어"
"옛날엔 안 그랬는데..."
익숙함. 일관성, 편안함. 이런 것들을 진정으로 원하면서도 동시에 거부하는 우리의 모순된 마음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일관성의 모순.
심리학적으로는 일관성, 익숙함은 그 예측 가능함으로 인해 불필요한 에너지를 쓰지 않도록 함으로써 삶의 스트레스를 감소시키고, 상황이 복잡한 경우에도 그것을 단순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장점을 제공합니다. 가까울수록 신경쓸 일이 줄어드는 법이죠. 연애 초기의 상황을 떠올려봐도 좋고, 남북한의 대치 상황을 떠올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를수록, 상대에게 익숙하지 않을수록 우리는 계속해서 긴장하게 되고 많은 에너지를 쓰게 됩니다.
하지만 그 익숙함은 때때로 엄연히 존재하는 진실이나 객관적 사실 역시 부정적인 치부해 버리는 부작용이 있습니다. 우리는 상대의 드러난 부분만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실제로는 드러나지 않은 빙산과도 같은 무의식의 정서는 이해하지 못한채 외적으로 표현되는 부분에 대해서만 인지하게 되고, 그 일부를 바탕으로 익숙함의 프레임을 적용하려고 합니다. 즉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짜맞춘 익숙함의 틀로 짜맞춰서 보는 것입니다. 다소 충격적인 예를 가져와서 한번 생각해 볼까요?
히틀러는 희대의 엽기적인 살인마로 역사에 기억되고 있습니다. 4천 6백만명이 히틀러가 일으킨 전쟁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는데 우리나라 전체 인구가 몰살당한 것과도 비슷합니다. 그런데, 히틀러가 화가 지망생이었다는 사실 알고 계세요? 그는 독서를 매우 즐겼고, 젊은 시절엔 그가 침공했던 예술의 도시 프랑스를 정말이지 사랑했다는 사실은요? 그리고 어린이와 동물을 매우매우 사랑했다는 사실은요?
비슷한 이야기로,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해방하러 연합군이 쳐들어갔더니 독일 친위대 장교들의 소지품에는 시와 평화를 이야기하는 괴테의 책들이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자기도 모르게 불편한 마음이 드는 분들 많으시죠. 지탄을 받아 마땅하다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모습들 조차 받아들여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이런것이 익숙함이란 기능의 구현 예입니다. 그게 마음이 편하니까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여러 측면을 보기 보다는 그를 규정하는 하나의 틀을 가지는 것이 보다 익숙하게 작동하니까요.
나와 상관없는 인물 이야기라고 치부하실지 모르겠지만, 매일의 생활에서도 우리는 이런 경험들을 많이 하며 삽니다. 회사에서 늘 친절하고 성실한 사람이 아내에게도, 가족에게도 잘 할 것이라는 기대. 뭐든 털털하고 쿨하게 '보이는' 사람에 대해서 그의 삶 역시 참 편안하고 쉬워 보일 거라는 기대... 나아가 오늘 나의 곁을 지켜주는 그 사람이 내일도 변함없이 그렇게 해 줄 거라는 기대, 나를 둘러싼 모든 환경이 내일도 당연히 변함없을 거라는 기대...
멀리 나갔죠. 다시 돌아와서 익숙함은 나에게 안정감을 제공하지만, 동시에 그 익숙함의 최대 피해자 역시 바로 나 자신일 수가 있습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익숙함을 기대하는 만큼, 반대로 사람들이 나에게 기대하는 모습에 갇혀서 살아야 하니까요. 상대방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 '판단'하거나 '필터링'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이는 것. 그런 것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순간의 삶을 더전하고 다양함으로 채워줄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우리는 나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의식의 수면 아래, 수많은 잠재하는 여러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엄연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나의 꿈, 나의 생각. 그리고 나의 컴플렉스들, 나의 내면들. 바깥으로 드러나 있지 않지만 나의 본질에 가까운 다양한 모습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익숙함이란 틀에 의해 스스로 희생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요. 반대로 사랑하는 사이에 있어서도, 내가 그 사람을 향해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에도 어쩌면 우리는 그의 내면을 받아들이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모습을 그에게 기대하고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요.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리고 증오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을
나의 일관성으로부터,
나의 익숙함으로부터 조금 놓아주어 보는 것은 어떨까요.
바로 나를 위해서요.
우리는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