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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인혁의 리얼월드 Sep 18. 2016

나는 어떤 사랑을 하는 사람일까

Life is Love - The Love Architecture

우리 삶의 평생의 화두이자 근간은 '사랑'입니다. 나라는 존재의 정체성 자체가 타인의 관심과 애정에 의해서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두 아이의 아빠로서 자녀를 키워보니 매일매일 '사랑'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더 실감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아이는 자신이 관심을 받고 있다고 느낄 때, 비로소 혼자서 마음껏 자기 놀이의 세상에 빠진다는 점입니다. 아이가 자다가 일어났을 때 부모가 곁에 없으면 언제나 울음을 터뜨리곤 하는데요, 자신이라는 존재를 자각하는 순간 혼자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관심을 받고 있다고 느낄 때, 비로소 자신만의 세계를 유영할 수 있다"


때로는 부모의 인내심을 시험하기도 합니다. 말도 안되게 떼를 쓴다거나 집안 물건을 파손하는 경우도 생기죠.이럴 때 부모는 아이에게 무관심을 보이거나 필요할 경우 매를 들기까지 하는데요, 흥미로운 점은 이럴 때 아이는 도망가기는 커녕 '필사적으로' 부모에게 더 매달리는 경향을 보입니다. 거리감을 두려고 할 수록 더 안아달라고 보채기 때문에 결국 부모는 포기하고 안아줄 수 밖에 없죠. 이내 미워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버립니다. 이렇게 아이들은 부모의 외면이나 차가움을 감지하는 순간 애정을 재확인하기까지 더욱 보채거나 매달리는 모습을 취합니다. 아이에게 사랑은 자신의 존재감입니다. 그것을 느끼기 어렵거나 결핍되었다고 느낄 경우엔 공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비단 아이만의 문제일까요?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아실 겁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시는 여러분도 다를바 없을 테니까요. 아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 역시 누군가로부터의 사랑을 열망합니다. 내가 사랑받고 있다, 사랑하고 있다를 인지할 경우에 우리는 사랑의 공포로부터 벗어나 다른 무언가에 관심을 뻗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누군가를 만나 사랑을 시작할 때면, 필연적으로 다음의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1. 좋아하는 감정을 확인한다.

2. 서로에 대한 깊은 사랑의 열정을 키워나간다.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때로는 가슴 벅찰 정도로.

3. 끊임없이 서로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변함없음을 확인하고자 한다.

4. 이를 바탕으로 내 삶의 의미있는 다른 무언가에 관심을 쏟는다(하지만, 그 충족감은 양쪽 모두가 동시에 경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보니 사실은 이때부터 서로에 대한 관심이 식었다고 느끼기 시작하는 순간을 경험하기도 한다).


아이가 부모의 사랑이 변함없음을 진정 믿을 때, 역설적이게도 아이는 부모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듯이, 사랑도 사랑을 확인하는 동안에는 사랑에 많은 것을 걸고 집착을 하기도 하지만, 나의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켜주는 사람이 확보된 마당에는 이제 다른 무언가를 바라보게 됩니다. 즉, 사랑이라는 것이 처음에는 서로를 바라보며 최대한 다가가는 것이 목적이지만, 그 다음부터는 함께 각자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각자의 삶의 방향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삶의 든든한 기반이 확보되었으니 이제 그 이상을 바라볼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사람마다 사랑을 구축하는 방법과, 사랑 에너지의 요구량에 차이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저 함께 해 주는 것만으로도 든든하다 느끼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사랑받고 있음을 '끊임없이 표현'함으로써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각자의 사랑 에너지의 요구량이 다르게 되면 결국 서로를 바라보다 자신의 길로 고개를 돌리는 '시점'에 차이가 발생하게 되고, 한쪽은 상대가 변했다고 느끼게 되는 상황을 맞게 되는 겁니다. 


  사람마다 사랑 에너지의 요구량이 다른 이유는 사실 간단합니다. 서로 다른 집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즉, 사랑이라는 것을 구조물이라고 생각했을 때 사람마다 다른 설계도를 가지고 집을 만들어 올린 것입니다. 알렝드 보통 작가는 이를 '지성파 사랑'과 '낭만파 사랑'이라고 구분을 하였는데 그림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러분의 사랑은 어떤 사랑인지 한번 같이 생각해 보세요.

사랑의 두가지 유형. 나는 어떤 유형의 사랑을 하고 있을까?


지성파는 자신의 존재감을 여러가지 축으로 안정화 시켜두는 유형입니다. 부모의 사랑도 한 축으로,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도 한축, 그리고 친구/동료등의 인정/사랑도 축으로 두면서 살아가는 유형입니다. 때문에 어느 한축이 흔들려도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구조물은 쉽게 붕괴되지 않습니다. 반면에 낭만파는 현재 자신이 하고 있는 사랑에 자신의 많은 것을(경우에 따라서 모든 것을) 거는 유형입니다. 그래서 상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끼면 그 상처는 때로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입니다. 자기가 사라져 버릴 정도의 충격을 던져주니까요. 


에릭은 무게를 폭넓게 분산했다. 여자 친구를 몇명씩 유지하는 것(거절을 당하더라도 곧바로 구조가 무너지지 않도록 위험을 줄이려고), 어느 집단이 등을 돌려도 생존할 수 있게 충분히 많은 집단과 교제하는 것, 어느 거래가 실패해도 견딜 수 있게 돈을 많이 버는 것등이 그 남자가 세운 기둥들이었다. 엘리스는 이와 딴판으로 매우 현명하지 못한 건축가였다. 그녀는 모든 욕구를 기둥 하나에 모으는 경향이 있었고, 그 기둥 하나가 온 무게를 견디기를 바랐다. - 알렝드보통의 우리는 사랑일까 중


각각의 유형에는 장단점이 분명한 편입니다. 어떤 것이 더 우월하거나 좋다고도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우리가 일생에 여러번의 사랑을 경험한다고 했을 때, 낭만파 사랑에서 느끼는 고통이 훨씬 크기 때문에 낭만파가 상대적으로 좋지 않다고 얘기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지성파는 낭만파 유형의 사람이 느끼는 깊은 사랑의 충만함을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낭만파는 함께 하는 미래의 중장기적인 플랜이 확고한 편이지만, 지성파는 일주일 앞도 확신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랑이란 언제든 깨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연인들이 처음으로 같이 잔 다음에는, 며칠 후나 몇 주일 후에 다시 만나자는 말이 중요한 의미로 해석되기 마련이다. 한 사람이 2주 뒤에 있을 생일에 대해 "내 생일날 그 연극을 보러 가요."라고 하면, 그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그 제안에는 적어도 그때까지는 두 사람의 관계가 이어질 것이라는, 미묘하지만 분명한 뜻이 담겨 있다. 관계가 진전되면 한쪽이 시간의 틀을 확장하고 싶어지고, 어느 시점이 되면 자신 있게 "돈을 모아 내년 말에 스키를 타러 가는게 어때?"라거나 "은퇴 후에는 유람선 여행을 할까?"라는 말까지 하게 된다. 하지만 에릭이 암시하는 시간의 틀은 극도로 짧아서, 한 주일을 넘어가지 않았다. 앨리스는 미래가 더 분명히 보이기를 바랐지만, 그 남자는 연대기적으로 장래에 관계되는 위험스런 일은 쏙쏙 빠져나갔다. 


여러분은 어떤 사랑의 건축물을 세워 두셨나요? 나는 지성파야, 나는 낭만파야 하고 딱히 두가지로 구분하는 것은 무리일 수도 있습니다. 본인을 둘러싼 사랑 외적인 환경의 상황에 따라서도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개념적으로 구분을 한 것일 뿐이지 이 두가지 개념 사이에는 매우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고 봐야하니까요. 그러나 적어도 내가 어떤 유형에 속하는지 구분하는데에는 매우 적절한 접근이라고 생각됩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이런 것입니다. 결국 언젠가 우리들은 사랑을 일정 수준 완성한 다음에는 자신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이가 부모의 품을 벗어나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개척해서 나가듯이, 이 때 부모는 작지 않은 상실감을 느낌에도, 그것이 아이의 자연스러운 성장이듯이, 우리 역시 열렬히 사랑을 하고 싶어하지만, 결국에는 서로의 미래를 기도해 주는 것이 필연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상대가 변했다고 바라보기 시작하면 마찰이 생기게 되고 결국 서로에게 섭섭한 일들이 쌓이게 되고, 결국 소원해 지는 비극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가만히 지금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려 보세요. 그리고 각자가 구축하고 있는 사랑의 아키텍쳐는 어떤 것인가 하고 잠깐 떠올려보세요. 행여나 지금 서로가 사랑하는 모습이 불만족스럽다 하더라도, 사랑의 건축물이 어떤 것인가를 인식하고 다시금 상대를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모습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모습을 서로가 인정해 줄 수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다시금 상기해 보세요. 우리 마음 속의 아이는 자신이 충분히 사랑받고 있다고 느낄 때 비로소 자신의 길을 제대로 걸을 수가 있게 됩니다. 사랑은 우리 삶을 지탱하는 가장 든든한 뼈대이자 힘입니다. 서로가 구축한 사랑의 모습을 이해할 때 우리는 보다 성숙한 모습으로 함께 삶을 걸어갈 수 있을테니까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요?


Life is Love. 



앞으로 사랑에 관한 글을 브런치를 통해서 풀어보고자 합니다. 저를 아시는 분들은 왜 송인혁이 다른 주제도 아니고 사랑? 이라고 의아해 하실 것 같습니다. 시대의 변화를 주로 다루던 제가 왜 지극히 개인적인 주제를 다루는 이유는 오히려 시대의 방향이 그것을 향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연결되고, 정보의 시대에서 관심의 시대로 변모한 지금, 오히려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일, 사람의 사랑을 이해하는 일이야말로 나의 삶과 세계를 이끄는 큰 원동력이니까요. 


여러분의 마음을 끌기에 충분했다면, 제가 이 주제의 글을 계속 쓸 수 있도록 응원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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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여러분의 생각을 브런치 댓글로 달아주세요. 


사람의 마음, 사랑의 마음. 

어떤 건지 여러분과 함께 이야기의 여정을 풀어가 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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