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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현 Jun 09. 2022

삶의 반대말

고레에다 히로카즈, <환상의 빛>

Maborosi(1995)
사람은 혼이 빠져나가면 죽고 싶어지는 법이야.


#죽음 #빛 #삶


 내게 영화는 이 대사에서 시작한다. '살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무엇인가에 이끌려 죽음을 택할 수 있을까. '환상의 빛' 같은 것을 본다면 그럴 수 있을 수도 있겠다. 히로카즈의 영화는 미야모토 테루의 원작 소설을 충분히 재현해내는 것을 넘어서 이 기막힌 죽음의 당위성을 완성해낸다. 그리하여 나는, 생각한다. 삶의 대안으로써 죽음이 기능할 수 있는 것인지를.



 유미코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 남편을 뒤로한 채, 남겨진 아들과 함께 삶을 감당한다. 아마 평생을 두고 그녀를 따라다닐 꼬리표는 남편의 자살일 것이다. 남편의 자살은, 도저히 맥락을 설명할 수 없이 그려진다. 남들은 모르는 그만의 사정이 있다기보다, 그는 그저 죽음에 이끌렸다. <상실의 시대>에서 그려진 가즈키의 죽음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시간은 더더욱 유미코를 옥죈다. 의문의 무게, 그리고 아들과 미망인이라는 삶의 무게는 그녀를 금방이고 죽음에 이르게 할 것만 같다. 나는 그런 불안감을 안고 영화를 보게 된다.


 매체로서 영화와 소설을 비교한다면, 시선에 초점을 두고 싶다. 소설을 읽을 때는 나는 유미코를 벗어난 서사에 마음을 두는 것에 스스로를 죄인처럼 느꼈다. 종이에 벤 글자들의 무게만큼이라도 그녀의 고통을 짊어지는 것이 독자의 책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며 유미코의 삶, 그리고 그녀의 삶을 이루는 주변 인물들의 삶에 눈길을 주게 된다. 그것도 아주 친절한 눈빛을.


 도모코는 외로웠을 것이다. '엄마'라는 존재를 갈구해왔을 것이고 때때로 아버지 몰래 눈물지었을 수 있다. 유미코를 처음 본 날 수줍어하던 그녀의 얼굴에서, 나는 앞으로 그녀 삶의 주어질 엄마라는 선물에 마음이 따뜻했다. 그와 동시에 유미코의 우울이 그 어린아이에게 조금이라도 향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고 유미코의 조력자이자 마을의 몇 없는 해녀 도메코 씨. 그녀는 파도의 거센 숨결을 읽듯이, 유미코의 마음속 짐을 꿰뚫어 본다. 그러나 그 시선이 아주 따뜻하고 섬세했기에 유미코는 그녀에게 마음을 연다. 그녀의 무해한 웃음, 잔 주름을 볼 수 있었던 것은 활자를 넘어선 영상이 주는 기쁨이다.


 때로 인연의 깊이와 무관하게, 마음속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은 상대를 만날 때가 있다.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가 마음의 빗장을 열게 하는 것이다. 유미코에게 도메코 씨가 그런 존재였을 것이다. 그녀가 있어 다행이다. 그와 같은 인연이 유미코 씨에게 허락된 다는 것, 삶을 힘들게 하는 것도 도리어 삶을 살아갈만하게 하는 것도 결국 사람임을 생각한다.


 다시 영화의 물음으로 돌아가, 그녀의 남편은 왜 죽어야만 했던 것일까. 유미코의 새로운 남편인 다미오는 그의 죽음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가 배를 타던 날, 그 특별할 것 없는 일상 속에서 빛이 그를 불렀다고 한다.


홀로 바다 위에 있으면 저 멀리 아름다운 빛이 보였대.
반짝반짝 빛이 나면서 아버지를 끌어당겼고.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이는 유미코를 위한 변명이 될 수 있을까. 전남편의 뒷모습을 그리며, 그 뒷모습에 말을 걸어 위태롭게 시들어가는 자신을 지탱해왔던 그녀에게 이 말도 안 되는 변명이 유효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이 변명을 꽤 진지하게, 그리고 마땅히 그러할 수 있는 일로 만들어내며 막을 내린다.


 대체 무슨 생각에서 다미오 씨가 그런 말을 했는지, 그 후에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저는 확실히 이 세상에는 사람의 혼을 빼가는 병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체력이라든가 정신력이라든가 하는 그런 표면적인 게 아닌 좀 더 깊은 곳에 있는 중요한 혼을 빼앗아가는 병을, 사람은 자신 안에 키우고 있는 게 아닐까. 절실하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병에 걸린 사람의 마음에는 이 소소기 바다의 그 한순간의 잔물결이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것으로 비칠지도 모릅니다. 봄도 한창이어서 짙은 초록으로 변한, 거칠어지기도 하고 잔잔해지기도 하는 소소기 바다의 모습을 저는 넋을 잃고 바라봅니다.

 자 보세요. 또 빛나기 시작합니다. 바람과 해님이 섞이며 갑자기 저렇게 바다 한쪽이 빛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어쩌면 당신도 그날 밤 레일 저편에서 저것과 비슷한 빛을 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만히 시선을 주고 있으니 잔물결의 빛과 함께 상쾌한 소리까지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이제 그곳만은 바다가 아닌,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부드럽고 평온한 일각처럼 생각되어 흔들흔들 다가가고 싶어 집니다. 그렇지만 미쳐 날뛰는 소소기 바다의 본성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잔물결이 바로 어둡고 차가운 심해의 입구라는 것을 깨닫고 제정신을 차릴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삶은  요동친다. 나와  감정은 요동치는 삶을 때때로  안을  없다. 그것은 나의 체력이나 정신력을 넘어선 문제다. 그저 혼이 빠져나가버리는, 그리하여  삶이 경멸스럽다거나 증오스러워서가 아닌 그저 비워내고 싶은 욕망이 생기곤 한다. 혼을 빼앗아가는 병이란, 이런  아닐까. 그때 그가  '환상의 ' 생의 완벽한 대안이었을 것이다. 바다에 비친 해의 부스러기와 잔물결이 굽이쳐 아름다운 빛으로 떠오를 , 그는 삶보다 먼저 죽음에 기울었던 것일 뿐이다.


 짙은 파도 아래의 어둠을 기어코 생각해낼 수 없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어쩌면 삶의 대안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생의 단절이 아닌, 빛을 따라간 죽음이 그들에게 허락되었던 것이다.



- 고레에다 히로카즈, <환상의 빛>(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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