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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현 Aug 03. 2022

운명의 농담, '키치'를 넘어선 사랑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운명적 사랑,

혹은 사랑할 운명


@rxspawn, Unsplash

 문학은 작가의 내면에서 일어난 주관적 사건을 서술 대상으로 삼는다. 그리고 이는 근본적으로 독자를 설득하기 위한 글이다. 따라서 작가의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경험이 문학을 통해 재현될 때, 이것이 독자에게 감동을 준다면 이는 설득의 목적을 충족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또한 문학은 ‘다르게 보기’를 통해 그 사람들에게만 보이는 경험과 사실을 전달한다. 우리는 문학을 통해 주관의 차이를 좁히고 세계에 대한 이해를 확장한다. 따라서 ‘위대한 작가’란 타인의 삶을 가정하고 기술할 때, 그것이 독자로 하여금 어떠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지를 예측하고 탁월하게 설득하는 자이다.


 이에 따라 문학 작품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이란, 독자에게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그를 설득하는 바로 그 순간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소설은 타인의 경험을 기술하는 것으로 더 깊숙한 엿보기이다. 즉, 타인의 경험을 기술함으로써 독자의 고정관념을 깨트리는 순간, 그것이 문학 작품의 가장 빛나는 순간이라 할 수 있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인간 존재가 삶을 두고 견지하는 무거움에 대해 반문을 제기한다. 책 제목에서 주지하듯 쿤데라가 보는 인간 존재는 ‘참을 수 없이’ 가볍다. 그럼에도 인간은 자신의 행위나 욕망에 ‘기필코 그래야만 한다’는 당위성이나 운명을 부여한다. 이에 대해 쿤데라는 과연 삶이 그렇게 무거운 것인가를 묻는 것이다.


 그의 말처럼 인간은 자신의 운명에 관대하며 무궁무진한 의미 부여를 지속한다. 특히 쿤데라는 ‘존재는 가볍다’는 그의 의견을 네 명의 인물의 삶을 통해 비춘다. 그들은 삶을 무겁게 받아들이며 운명에 묶여 있다가 삶의 가벼움을 발견하기도 하고, 반대로 삶을 가볍게 대하다가도 운명을 인정한다. 쿤데라는 ‘존재는 가볍다’라는 의견을 네 명의 가상 인물을 통해 독자에게 드러낸다.


 그러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쿤데라가 독자에게 특정한 삶의 태도를 받아들이라 강요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는 ‘키치(Kitsch, 천박한 모조품)’라는 개념어를 내세워 ‘영혼’과 ‘육체’, 그리고 ‘존재’나 ‘영원회귀’ 사상과 같은 다양한 담론들을 펼쳐낸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사랑에 대해 말한다. 쿤데라는 네 인물들이 선택한 삶과 사랑에 대한 평가를 독자에 판단에 맡기며, 다양한 삶의 가능성을 점검하고 존재의 가벼움에 대해 생각해보라는 의도를 내비친 것이다. 어떠한 삶을 살아도 괜찮다.


 따라서 나는 이 작품이 “당위성(Kitsch)을 벗어나 당신의 삶을 영위하라”라는 독자를 향한 전언에 다름없다고 본다. 그리고 쿤데라가 작품의 의도나 목적을 드러내는 데 있어 사용한 방식이 이 작품을 특별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는 기본적으로 전지적 작가 시점을 취하지만, 입장과 시간의 흐름을 바꾸거나 작중에 개입해서 편집자적 논평을 가하기도 한다. 특별히 그는 인류의 보편적 감정인 ‘사랑’을 통해 다소 난해한 그의 의견을 전달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안나 카레니나>를 겨드랑이에 끼고 프라하의 거리를 쏘다녔다. 저녁에 그녀가 초인종을 눌렀고, 그가 문을 열었다. 그녀는 책을 놓지 않았다. 그것이 마치 토마스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장권인 양. 그녀는 자기가 가진 통행증이라곤 이 비참한 입장권밖에 없음을 깨달았고 그것 때문에 울고 싶어졌다. 울음을 참기 위해 그녀는 수다스러웠고 큰소리로 말하고 웃었다.     


 ‘당신의 삶을 영위하라’는 작품의 목적은 주로 인물 간의 사랑을 통해 나타난다. 그가 선택한 네 명의 인물 토마스와 테레사, 프란츠와 사바나는 서로 간의 사랑과 일련의 사건을 통해 ‘존재’에 대한 인식을 옮겨간다. 가벼움에서 무거움으로, 그리고 무거움에서 가벼움으로 말이다. 바로 이 지점을 잘 드러낸 순간이 나는 이 소설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쿤데라가 영혼과 육체를, 가벼움과 무거움의 담론을 책에 담았다고 말한 바 있다. 테레사는 <안나 카레니나>를 통행권 삼아 토마스에게로 향하는 문을 두드린다. 이는 육체적이고 가벼운 그녀의 세상에서, 영혼을 중시하고 무거울 것으로 보이는 토마스의 세계로 향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토마스의 세계가, 영혼이 중요한 무거운 세계일 것이란 추측도 테레사의 키치에 불과함이 이후에 드러난다. 이마저도 키치의 농담일 것이다. 어쨌든 그녀는 경박한 어머니와 천박하게 구는 손님들이 있는 레스토랑과 그녀의 집을 떠나, 진중하고 차분하며 고상한 영혼의 소유자처럼 보이는 토마스의 세계로 옮겨간 것이다.

     

 테레사는 자신의 삶이 ‘영혼’을 궁금해하지 않는 이들로 가득 찬 것을 괴로워했다. 그녀에게 있어 육체는 영혼을 담는 그릇에 불과했으나, 레스토랑의 천박한 손님들과 경박한 어머니는 육체에 속할 뿐이었다. 그래서 책을 펼쳐 들고 정중하게 자신을 부른 토마스에게 의탁한 것이다. 그러나 테레사의 확신과 다르게 토마스는 다양한 여자와의 육체적 관계를 즐기는 가벼운 세계에 속한 사람이다. 이 반전은 테레사의 키치가 좌절로 이어짐을 나타냄으로써 독자에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전하는 목적을 충실하게 이행한다. 당신의 확신이, 당위성이, 운명이 얼마나 가벼운 것인지를 말이다. 


 또한 이 사건은 ‘세계 간의 이동’이라는 방법의 측면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쿤데라는 가벼움과 무거움, 영혼과 육체 등으로 이분화된 두 세계를 설정하고 이를 오가는 네 인물들을 설정한다. 위 사건에서 테레사는 가벼움의 세계에서 토마스의 무거운 세계로 이동함으로써 소설 속 ‘첫 번째’ 세계 간 이동의 발걸음을 뗀다. 물론 토마스가 속한 세계의 진실과는 관계없이 말이다.


 그러나 소설의 말미에 토마스는 자신이 속한 육체의 가벼운 세계를 청산하고 테레사가 속한 영혼의 무거운 세계로 옮겨온다. 물론 오랫동안 자신의 영혼을 살피지 않는 토마스를 보며 테레사도 그를 떠남으로써 영혼의 세계를 거의 포기할 뻔했다. 그러나 둘은 서로 간의 사랑을 확인하고 영혼의 세계, 무거운 운명의 세계에 머문다. 이와 같이 세계 간의 이동은 반복적이고 한 인물 내에서도 다양하다. 또 다른 인물인 프란츠와 사바나에게도 이러한 '순환적 이동-가벼움에서 무거움으로, 다시 무거움에서 가벼움으로'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았을 때 위 사건은 소설의 목적과 주제 철학을 단축해서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소설의 목적은 ‘인간 존재란 참을 수 없이 가볍다’라는 작가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리고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 철학은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에 대한 적확한 역(逆)이다. 영원히 반복되지 않는, 단 한순간에 사라질 것들은 의미가 있을 수 없다. 인간의 삶은 영원하지 않으므로 무거울 수 없고 가벼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물들의 세계 이동이 순환적이고 반복적인 변주를 갖는 것은 이러한 영원회귀 사상을 떠올리게 한다. 삶은 영원히 회귀하지 않으나, 우리가 가진 운명에 대한 당위는 삶을 마치 영원히 회귀하는 것처럼 이끈다. 그러니 쿤데라가 키치를 말할 수밖에.


 그러나 수많은 아름다운 문장과 사건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사건이 내게 가장 빛나는 까닭은 ‘사랑’ 때문이다. 테레사가 <안나 카레니나>를 입장권 삼아 문 앞에 초라하게 서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사랑 때문이었다. 그 사랑의 시작이 비록 그녀가 바라던 운명이 아니었더라도, 생애의 막바지에서 둘은 지독한 방황을 끝내고 서로를 사랑했다. 그 사랑은 테레사를 괴롭혔던 영혼과 육체의 싸움도, 토마스가 고민했던 가벼움과 무거움의 세계 간의 이질성도 극복했다. 이를 통해 ‘인간의 존재는 가벼울 지라도 사랑은 가볍지 않다’는 소설의 주제를 확인할 수 있다. 위 사건은 이러한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서막으로서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존재는 가볍되, 사랑은 가볍지 않다. 테레사가 토마스를 찾아가는 이 사건이 아름다운 것은, 한 장면으로 작가 자신이 던진 물음을 환기함과 동시에 화두에 대해 독자가 스스로 답하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사건을 통해 ‘존재는 가볍다’는 작가의 의견에 동조하게 되었으며, 존재는 가볍지만 사랑은 무거울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를 통해 고정관념을 깰 수 있었다.


 사랑은 인간에 속한 것이라 생각했고 존재 이하의 영역이라 여겼다. 그러나 작가는 자신이 공들여 설계한 존재의 가벼움에 대한 논리를 ‘사랑’이 넘어서는 것을 허용함으로써, 사랑이 존재 이상의 독립적이고 고고한 영역임을 천명했다. 이로써 나는 나의 삶에 키치로 여겼던 것들, 삶을 걸어 이루어야 할 목표로 여겼던 것들에 대해 진정 그것이 나의 무거운 운명인 것인지 자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사랑이 이러한 논쟁을 넘어서는 무엇일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존재와 삶에 대한 나의 인식 세계를 넓힐 수 있었다.


 테레사가 토마스를 만나는 사건, 바로 그 지점을 설명한 저 세 마디 문장이 내게는 ‘하와가 선악과를 베어 물었던’ 바로 그 순간처럼 느껴진다. 이 사건으로 인해 토마스의 가벼운 세계에 균열이 갔고, 영혼의 사랑을 원했던 테레사는 끝없는 괴로움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그러면 또 어떠한가. 삶은 반복되지 않고 돌아오지도 않는 순간의 것이니 괜찮다.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다.

 

 모두는 ‘단 한 번도 연습하지 않은 채 무대에 서는 배우’와 같이 삶에 들어선다. 그러니 어떠한 실수도, 선택도 당신의 것이다. 참을 수 없이 가벼운 당신의 존재는 어떠한 짐도 당신에게 부여하지 않는다. 다만 결코 가볍지 않은 ‘사랑’이 있을 뿐이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2009)

-박웅현, <책은 도끼다>, 북 하우스(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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