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헤어질 결심>
해일이 덮은 그녀의 죽음은 그와의 사랑을 영속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쉽게 쓰인 시를 어렵게 읽는 것만큼 미련한 일은 없다. 박찬욱 감독은 영화를 두고 '보편적인 멜로'라 칭했다. 이것이 대중을 향한 그의 변명처럼 들릴지는 몰라도, 일련의 인터뷰를 보다 보면 그가 진심으로 한 말이란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영화가 무수한 미장센을 허락하고 언어의 한계를 시험하는 의미를 갖지만, 본질적으로 단순한 사랑 이야기라는 점은 동의한다.
그렇다면 영화가 말하는 사랑은 무엇인가. 둘의 사랑은 '상대를 끌어내리는 것'처럼 묘사된다. 사랑은 상대방이라는 기표를 두고 자신의 언어를 시험하는 것이다. 사랑을 시작하는 순간, 나는 타인과 나의 일부분을 나눠가지며 마찬가지로 나의 욕망도 드러나게 된다. 왜 해준은 아내에게 안정을 주지 못했는가. 이는 그가 '죽음'을 해결하고자 하는 욕망을 지녔기 때문이다. 아내와 해준의 사랑은 죽음이 늘 가로막고 있었다. 형사인 해준은 늘 타인의 죽음을 해결하고자 하는 욕망을 지녔으며, 이로 인해 아내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없었다.
반면 서래와는 어떤가. 해준은 서래와 '죽음'으로 이어진다. 서래의 남편 기도수의 죽음은 해준에게 욕망을 제공했다. 그는 평소처럼 환경에 휘둘리지 않고 꼿꼿한 자세로 사건을 파헤친다. 그러나 서래의 서툰 말과 석연치 않은 과거 행적으로 인해 해준은 그녀를 의심하게 되고, 입이 아닌 눈으로 현실을 바라보는 그녀에게 빠져들게 된다.
의심은 해준을 그답게 만드는 요소이다. 서래를 사랑함으로써 이를 점차 내려놓고 종국에 그녀의 살인을 감추었을 때, 그는 붕괴되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 욕망은 이미 죽음이 아닌 서래로 치환되었다. 시장에서 이뤄진 재회는 이를 방증한다. 그는 서래를 만나 '다시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므로. 어쨌든 해준의 사랑은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게 했고 서래는 해준을 부산에서 이포로 끌어내렸다.
그러나 해준이 포기한 것이 죽음을 해결하는 욕망이라면, 서래는 삶을 포기했다. 서래의 욕망은 삶이었다. 모국을 떠나 남편의 폭력을 감내해가며 지독하고 지리멸렬하게 이어온 삶이었다. 더 늦게 사랑에 빠진 탓에 그녀는 해준보다 더 큰 값을 치른 것이다. 그래서 둘의 사랑은 더 숭고하고 애절하다. 서래는, 마침내 헤어지지 못하고 사랑의 잔상을 죽음을 통해 박제하고 만 것이다.
해준을 향한 서래의 분명한 사랑의 표현은 외적으로 장르의 파괴이며, 언어도단이다. 팜므파탈의 매력을 가진 누아르의 여주인공은 끝없이 주인공을 위기에 몰아넣고 원하는 바를 쟁취한다. 그러나 전반부까지 베일에 쌓였던 누아르의 여주인공은 후반부에 선명하게 마음을 드러내며, 스스로를 위기로 몰아넣는다. 이는 장르의 문법을 파괴한 처사이며 무엇보다 박찬욱스러운 전개라는 점에서 반갑다.
또한 서래와 해준의 사랑은 언어를 뛰어넘는다. 해준은 극 중 '사랑한다'고 직접 서래에게 말한 바가 없다. 그러나 서래는 해준의 사랑을 ‘듣는다’. 그렇게 꼿꼿하던 해준이 자신의 욕망을, 삶의 자세를, 자부심을 내려놓는 모습이 서래에게 온몸으로 사랑한다는 표현이 된 것이다. 이렇게 둘의 사랑은 언어의 시험을 뛰어넘는다. 둘의 다른 언어도 그들의 사랑을 가둘 수 없다. 통상적으로 언어는 개구즉착(開口卽錯)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모든 말은 말을 한 그 즉시 틀리다. 입 밖으로 꺼낸 순간 원래의 의미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둘의 사랑은 언어를 초월함으로써 의미의 착색을 피해갔다.
결국 서래의 죽음은 둘의 사랑을 영속화하고자 하는 시도임이 분명해진다. 언어로 표현되지 않은 사랑이 둘에게 더 분명하게 전해진 것처럼, 서래는 사랑의 순간을 죽음을 건너 영원(永遠)으로 잇는다. 그녀가 묻어주었던 까치처럼 서래도 파묻힌다. 진실을 감춘 다른 인물들이 죽음을 향해 추락하며 삶을 드러냈다면, 서래의 죽음은 끝까지 비밀을 간직한다. 그녀의 모호한 말도, 훤히 들여다볼 수 없는 속도 그렇게 미제로 남을 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죽음은 마침내 둘의 사랑을 영속화한다.
- 박찬욱, <헤어질 결심>(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