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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현 Dec 10. 2021

누구도 타인을 구원할 수 없다

스티븐 달드리,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2009)

#무의식 #초자아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는 어린 마이클 역을 맡은 데이빗 크로스의 성장에 맞춰 수년 동안 촬영을 이어간 특별하고 실험적인 영화이다. 마치 해리포터 연작처럼, 관객들은 아역배우의 성장과 다른 배우들의 늘어가는 주름 속에서 시간의 흐름을 느낀다. 단 한 편의 영화에서 말이다.


 이처럼 영화는 시간의 흐름, 그리고 시대성에 대한 절대적인 관심을 잃지 않는다. 영화의 배경마저 전후 독일을 무대로 한다. 전범 세대에 대한 후대의 책임 추궁과 비판은 전후 독일의 시대적 분위기를 드러내는 단상이다. 스무 살 이상이 차이나는 두 남녀의 지위는 전범 세대와 후대의 대표 격이며 그들의 아슬아슬한 사랑은 객관적인 가치 판단을 모호하게 한다. 사랑하는 이가 전범자라는 사실과 문맹이라는 실체적 아픔, 그리고 일반적인 기준을 상회하는 나이차 등이 그렇다.


 한나는 유대인 학살을 자행했던 나치 친위대에서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관리직으로 일했다. 하지만 그녀는 글을 읽지 못하는 문맹이었으며, 공장의 사무직 승진을 앞두고 승진을 포기한 뒤 친위대에 자원했던 것이다. 훗날 전범재판에서 과거 동료들은 한나의 문맹을 약점 잡아 그녀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다. 스스로를 변호하지 않는 한나를 두고 살길을 모색한 것 일터. 그럼에도 한나는 자신의 문맹을 알리지 않음으로써 자신에 대한 변호를 거부한다. 그녀에게는 전범이라는 꼬리표보다 문맹이라는 실체적 증언이 더 두려웠던 것이다. 


 아주 무심하게 서사의 흐름을 따라간다 해도, 한나가 글을 읽지 못한다는 사실은 꽤 초반부터 알 수 있다. 서사적 장치들이 곳곳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나의 무의식이다. 글을 읽지 못한다는 그 사실에 대해 그녀는 굉장히 날카로운 자기 방어적 기제를 보인다. 여행 중에 미하엘을 향한 분풀이가 가장 직접적인 예시이지만, 그 방어기제로 인해 그녀가 자신을 억압한다는 사실에 위험성이 크게 드러난다.


 글을 읽지 못한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감당할 수 없는 현실임이 분명하다. 고아 출신에다 글을 배우지 못했던 그녀는 타인과 감정을 깊게 교류해본 경험 자체가 없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상처를 인정하기보다 부정하고 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연약한 내면을 들키지 않기 위해 그녀는 더욱 날카로워졌을 것이며 그렇게 타인의 진입을 통제하였다.


 그 틈새를 파고든 것이 열다섯 살의 소년이다. 마이클이 구토 증세로 위기에 처했던 비 오는 날의 거리, 전차 승무원 한나는 그를 돕게 되고 이후 둘은 이끌림에 의해 첫 경험을 나누게 된다. 흥미로웠던 것은 스무 살이라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관계에 있어 둘 모두가 순수하고 어리숙해 보였다는 것이다. 이는 내면의 공간에 타인이 들어온 적이 없었던 한나의 삶을 대변한다. 그렇기에 감정을 표현하고 확인받는 것에 있어서도 사춘기 소년인 마이클이 더 적극적인 모습을 취한다. 언제나 한나를 갈구하는 것은 이 어린 소년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둘의 관계가 기울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상대를 더 오래 기억하고 그의 존재를 바랐던 것은 한나 쪽이다. 뜻하지 않은 승진으로 인해 사무실에서 일을 할 처지에 놓인 그녀는 다시 한번 더 문맹의 상처를 직면하기 거부하고 도망친다. 마이클을 붙잡기에는 한나의 상처가 깊었다.


 그렇게 한나는 수감된다. 그러나 끝없는 어둠과, 실체적 고통의 끝에서 그녀는 일어선다. 마이클이 수용소로 보낸 녹음테이프를 붙들고 글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10년이라는 시간을 지나 그에게 답장한다. 그러나 마이클은 침묵했다. 한나가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간 상처를 극복했음에도 불구하고.


너, 네가 내 마음을 아프게 한 것 같다고 말하려는 거지? 넌 내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없어. 넌 그렇게 할 수 없다.


 한나의 불행하고 연약한 내면은 이미 수차례 묘사되었다. 그에 비해 마이클에게는 사춘기 소년의 당돌함과 오기가 있었을 뿐이다. 더욱 절망적인 것은 시간이 흐른 뒤 그의 모습으로부터도 어떠한 용기나 책임감을 읽을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한나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라 할지라도, 딸에게도 한나에게도 그는 그저 냉담한 타인에 불과했다. 딸에게는 사랑을 주지 않았으며, 한나에게는 손을 내어주지 않았다. 이는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이토록 연약한 남자에게 한 사람의 운명을 맡기는 일 자체가 비극이다.


 한나의 노년을 바라보며 가졌던 가장 큰 절망감은 그녀가 마이클로부터 구원받으려 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이미 그 오랜 시간 자신을 옥죄었던 문맹이라는 상처로부터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한나는 타인으로부터의 구원을 기다렸다. 억압된 자아를 극복하기까지의 과정에 마이클의 존재가 절대적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진정한 회복은 자신이 스스로 이루어내야 하는 것을 그녀는 몰랐던 것 같다. 


 진정 사랑이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는가. 천만에, 한나의 삶은 그녀의 눈먼 사랑에 희생되었다. 물론 억압된 자아를 극복하고 감옥에서의 오랜 시간을 버티게 한 것이 한나의 숭고한 사랑 덕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이클의 노력은 죄책감에서 비롯되었을지라도 그들의 사랑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종국에 한나를 죽게 만든 영화적 장치는 이미 삶의 목적을 잃은 그녀에게 두 번의 실형을 선고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 사회적 죽음은 그녀가 전범의 죄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과, ‘전범자에게 사랑은 허락되지 않는다’ 전언을 의미한다. 그래서 내게 영화의 결말은 매우 불쾌하다. 그녀를 구원할 수 없었던 세상에 과연 어떤 의미와 아름다움이 남을 수 있을까.



- 스티븐 달드리,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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