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그날 밤, 나는 그녀와 잤다. 그러는 것이 옳았는지 아닌지 나로선 알지 못한다. 2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역시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영원히 알 수 없으리라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랑 #죽음 #구원
삶은 한 번뿐이다. 모두에게 그렇다. 밀란 쿤데라의 저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삶은 ‘한 번도 리허설을 하지 않고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던져진 것이라 말한다. 그렇게 무대 위에 던져진 우리는 무엇이 옳은지, 어떤 선택을 희구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많은 이들이 하루키가 삶을 기술하는 관조적 태도를 불편해한다. 예컨대 혁명에 대한 비관적 태도나 시대상을 외면하는 듯한 문체가 그렇다. 그렇다고 하루키가 단 한 번도 생의 의지를 보이지 않은 그런 건조한 사람은 아니다. 적어도 이 책에는 누군가를 상처 입히고 또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일에 지쳐, 다시는 사랑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청년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것은 주인공 와타나베의 의식이다. 그는 사람들을 관찰하지만, 그를 관찰하는 우리는 그의 주변 사람들을 통해 그를 들여다보게 된다. 친구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죽은 친구의 연인으로부터 끝내 선택받지 못하는 사랑은, 인간이 규정한 '상실감'이라는 언어의 감각을 초월한다.
그리하여 나는 묻게 된다. 죽음을 대체할 수 있는 사랑이란 가능한 것일까. 끝내 죽음을 선택한 나오코와 하츠미는 어떤 방법으로든 구원받을 수 없었던 걸까. 결국 그는, 아무도 상처 입히지 않고 여러 타인과 깊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하루키는 책을 통해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를 그려보고 싶었다고 한다. 그리고 ‘시대를 감싸고 있었던 공기’를 전달하고 싶었다고도 덧붙인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는 어떤 시대적 분위기가 작용한다. 시대의 낭만이 곧 사랑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절망의 시대에 사랑이 좌절되기도 한다. 예컨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나 황인훈의 <광장>은 냉전체제의 격동 속 사람과 사랑의 향방을 다룬다. 그러나 <상실의 시대> 속의 시대는 주변적이다. 하루키의 시대정신은 사건이 아닌 사람에 있다.
그러나 나오코가 그의 앞에 등장한 이후로, 와타나베는 죽음을 관장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이때 시대와 사람은 교묘히 섞인다. 갑작스러운 친구의 자살, 본질은 숨긴 채 가치를 팔아치우는 대학가 시위, 그리고 비로소 다시 겪게 될 죽음들. 일련의 사건들이 시대의 ‘상실’을 그에게 던져준다. 그리고 그는 상실의 틈에서 누군가를 선택해야 한다. 죽은 가즈키의 화신이 되어 그의 연인이었던 나오코 옆에 남을 것인지, 아니면 미도리의 당돌한 사랑에 발을 맞출 것인지를 말이다.
‘이봐, 가즈키. 너는 기어코 나오코를 손에 넣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래, 좋아. 나오코는 원래 네 것이었으니까. 결국은 그녀가 가야 할 장소였겠지 아마.
하지만 이 세계에서, 이 불완전한 산 자의 세계에서, 나는 나오코에게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어. 그리고 나는 나오코와 둘이서 어떻게든 새로운 삶을 구축하려고 노력했어. 그렇지만 괜찮아, 가즈키. 나오코는 네게 줄게. 나오코는 네 쪽을 택했으니까. 그녀 자신의 마음처럼 어두운 숲 깊은 곳에서 목을 맨 거야.
그러나 와타나베는, 도망친다. 그리고 무너지는 것을 선택한다. 그의 앞에는 죽음을 곁에 둔 친구의 여인과, ‘언젠가 반드시 보답받기’만을 기다리는 사랑스러운 여자가 있다. 그 어느 쪽도 그에게 가벼울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누구라도 그에게 옳은 선택을 강요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를 위로할 수 있는 이유는 선택을 둘러싼 모든 것들에 사랑의 흔적 담겨있다는 점 때문이다. 나오코 자신도, 와타나베도 알지 못했을 뿐 나오코와 와타나베는 서로를 사랑했다. 그녀에게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이 각각 따로 존재했을 뿐이다. 사랑이 꼭 삶의 이유가 된다거나 삶과 동일시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를 사랑하지만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도리는 어떤가. 그녀는 와타나베를 사랑하기 때문에 연인과 헤어졌고, 도망만 가던 그를 매번 붙잡아 세웠다. 그리고는 그녀 삶의 지주이던 아버지의 마지막을 그와 함께 보내드렸다. ‘좋아하고 있으면 언젠가는 반드시 보답받는 날이 올 것’을 천명하듯, 그녀의 사랑은 또렷하고 애처로우며 와타나베 주위의 여자들 중 가장 큰 당위성을 갖는 것처럼 보인다.
미도리는 쟁취하는 사랑이 아름답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분명하게 각인시킨다. 설사 그녀를 선택하는 것이 곧 나오코의 죽음을 의미할지라도 이 사랑의 당위성을 누구도 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맹목적인 사랑은 죽음의 언덕에 발들인 와타나베에게 구원이 될지도 모른다.
결국 이야기의 끝은 선택이 아닌 운명으로 흘러간다. 나오코는 죽은 가즈키의 곁을 향하고, 와타나베는 길을 잃는다. 죽은 친구의 여자와 밤을 보내고 만 그 순간이 이 끝없는 심연의 시작이었을까. 그가 아니었다면 나오코는, 실낱같은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죽음이 그렇듯, 상실은 무엇도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나오코에게 구원의 증표가 ‘삶’이 아니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와나타베의 생각대로, 죽음을 향한 그녀의 선택이 가즈키로 향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오코의 심연을 헤매고 이 글을 써 내려가면서 나는 깨달았다. 나오코는 자신을 향한 와타나베의 사랑을 통해, ‘연인의 죽음을 방치한 죄인’이라는 형벌로부터 구원받았을 것이다. 그녀의 죽음은 비록 생명의 상실이나, 한편으로는 와나타베의 삶을 응원하는 사랑의 표현이다. 삶에 잠식되는 것은 자신 하나로 족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루키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를 어떻게 정의 내렸던 것일까.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모습은 죽음을 곁에 둔 결의를 갖추기도 하지만, 단 한순간만으로도 마음이 뺏기는 야속함을 띄기도 한다. 우리는 그 안에서 끝없이 방황하고 상실을 겪을 뿐이다. 하루키는 이를 통틀어 ‘상실’이라 표현했다. 사랑이란 결국 서로의 겉을 벗겨내는 미련함이자, 상실 그 자체이다.
당신의 생각은 어떠한가. 당신은 사랑을 죽음에 빗대어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이러한 생각은 꽤 유의미한 일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주지하듯 사랑은 때로 세계의 확장이 아니라 세계의 파괴를 의미하기도 하니. 죽음은 당신 사랑의 형태를 비춰볼 좋은 거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문학사상(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