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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현 Jan 26. 2022

모순의 삶을 관조하다

양귀자, <모순>

@babybluecat, Unsplash
안진진, 환한 낮이 가고 어둔 밤이 오는 그 중간 시간에 하늘을 떠도는 쌉싸름한 냄새를 혹시 맡아본 적 있니?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그 시간, 주위는 푸름 어둠에 물들고, 쌉싸름한 집 냄새는 어디선가 풍겨오고. 그러면 그만 견딜 수 없을 만큼 돌아오고 싶어 지거든. 거기가 어디든 달리고 달려서 마구 돌아오고 싶어 지거든. 나는 끝내 지고 마는 거야.....


#모순 #삶 #선택 #기필


 삶의 무궁한 모순들은 언제나 실낱같은 가능성으로 존재하되, 인식하게 될 때에는 감당하기 버거워지기 마련이다. 이모와 엄마의 운명을 가른 중매는 가능성으로만 존재하였으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기르면서 두 사람의 삶이 가진 모순의 무게는 둘 모두에게 버거워졌다.


  ‘사는 것 같은’ 생명력있는 삶은 바랐던 부자 이모와, 자신의 삶을 비관함으로써 역설적이게도 삶의 동력을 얻었던 가난한 엄마의 삶은 모순적이다. 아, 삶은 그런 그런 것인가. 눈앞의 모순을 판단할 수도, 예견할 수도 없으니 결국 그 모순에 기대어 살아가는 것일까. 삶은 그렇게 속절없는 것인가.


 아니다. 지리멸렬한 현실은 그 자체로 위협이고 상처이며 누군가에게는 벗어날 수 없는 온 생애의 굴레와 같은 것이다. ‘그래야만 하는’ 당위성이 가득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삶의 모순을 관조하라는 것은 폭력에 가까운 조언이다. 나는 안진진이 김장우를 선택하기를 바랐다. 그렇게 현실에 휘둘리지 않고 용감한 선택을 하길 바랐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선택하지 않았다. 형이 잠든 사이에 양말을 빨아두는 그로부터, 독자들이 안진진의 아버지를 떠올리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이 서사적 장치는 안진진이 나영규를 선택하는 당위성을 형성하기 위함이었을까. 그녀는 어머니의 삶을 택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장우가 가진 삶의 태도와 이야기가 아버지의 그것과 닮은 것은 무의식 속 아버지에 대한 안진진의 그리움을 심화시킨다. 이모와 닮은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란 존재 모두가 안진진에게 모순이다. 모순은 종국에 이모와 아버지 둘을 잃게 만들었다. 어머니도 이전과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녀는 결국 모순의 굴레를 벗어던지기 위해 ‘더 사랑하는 쪽’을 포기했다. 믿고 싶지 않은 선택이다.


 내 생각에 작가는 아주 늦게, 진진의 선택을 써 내려갔을 것이다. 진진은 결국 당위성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 분명하기에, 작가는 소설의 명운을 가를 이 순간을 오래 간직해야 했다. 그러나 그 선택을, 작가가 아닌 진진이 한 것만은 분명하다. 자신이 종이 위에 쓰인 존재라는 것을 알 리가 없는 그녀가 스스로의 삶을 선택한 것이라는 말이다.


 물론 작은 생각들이 진진을 또 다른 선택으로 이끌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럴 수 있었다면 해질 녘의 푸른 어둠을 두려워하는, 끝끝내 손을 맞춰보지 못한 아버지와의 화해를 김장우가 대신해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나영규를 선택했다.


 그녀에게는 삶의 모순을 관조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지리멸렬하고 비극적인 삶의 관성을 벗어나고 싶었기에, 이제껏 살았던 삶과 다른 삶을 선택한 것이다. 아니, 선택이라기보다는 서글픈 도박에 가깝다. 자신의 삶에서 되풀이되어서 안 되는 것들을 단정 짓고 다른 경로를 찾아 나선 그녀의 결정은, 그래서 시리도록 아프다.


 삶은 많은 가능성들 중 극히 일부만을 상수로 허락한다. 진정 삶을 즐기는 이들은 허수를 가지고 노는 사람들 아닐까. ‘모순’이라는 게임의 법칙을 비웃을 수 있는 그런 사람들 말이다. 그녀의 이번 생은 게임에 초대받지 못했다. 그것이 전부다.



- 양귀자, <모순>, 살림(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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