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랑, <메달리스트의 좀비시대>
메달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한 번도 캐스팅되지 못한 배우, 설계가 채택되지 않아 시공된 건물이 없는 건축가, 선거마다 당선되지 못하는 정치인, 훈련만 하다가 우주에는 나가보지 못하고 은퇴한 우주비행사에게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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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런 무신경함이라면 상대를 가리지 않고 그럴 수도 있겠다.
#사람 #공허 #우선순위
좀비물의 역사를 잘 알지는 못해도, 예측컨대 코로나19가 좀비물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임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질병의 고통 아래 우리의 일상도 좀비화 되어갔기 때문이다. 사회로부터, 집단으로부터 우리는 스스로 격리되기를 자처했고 우리 안의 우울과 홀로 채우는 공간에 익숙해졌다. 당연히 문화도 수많은 변화를 허락했다. 원마일 웨어라든가, 혼밥이라든가 우리네의 삶은 더 간소해져 갔고 이는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허례로 이어지던 종잇장 같은 관계들은 질병 속으로 사라져 갔다.
오랜 시간이 지나, 결국 질병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우리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간소해진 삶의 문화는 각기 자신을 비추는 시야를 허락했다. 이전보다 내 감정을 더 살피기 원했고 감춰졌던 많은 대화들을 가능하게 했다. 나는 이러한 변화들을 이끈 질병을 '좀비'로 치환해도 무관하다고 본다. 질병의 전개 방식이나 형태 등의 외관적 변화도 그러하겠지만, 죽음을 곁에 둔 실존적 두려움이 우리를 내적으로 고립시키는 점이 특히 더 비슷하기 때문이다.
최근까지도 큰 관심을 받았던 좀비물 <지금 우리 학교는>은 도시의 좀비화로 극한으로 치닫는 상황 속에서 부유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관계', 그리고 '감정'에 대해 그렸다. 어린 시절부터 키워 온 우정 혹은 사랑, 아버지의 딸을 향한 사랑, 조용한 동경과 서글픈 애착, 분노와 복수 등 감정의 향방이 서사의 중심이다.
관건은 극한의 상황 속에서 당신의 마음을 이끄는 것이 무엇인지를 영화가 묻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오래 지켜온 사랑을 서로 확인하는 아름다운 일도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욕망의 결정체인 인간은, 죽는 순간까지 자신만의 욕망을 쫓는 편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결국 영화는 죽음을 앞둔 당신의 욕망에 대해 넌지시 묻는다.
타인과 공명이 필요한 사랑은 그래서 실없고, 공허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좀비들이 떼를 지어 쫓아오는 판에 시간은 당신 편이 아니다. 그리고 그러한 긴박함은 사랑의 순수성을 위협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랑은 순수한 욕망이 될 수 없다. 끝까지 '홀로' 추구할 수 있는 것들이 진정한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이전에 욕망의 결정체이다. 나는 이 사실을, 좀비들을 앞두고도 '메달리스트'를 꿈궜던 정윤에게서 확인했다.
정윤은 사랑했던 이들을 화살로 쏘고, 자신을 위한 화살 한 촉을 간직하는 비장한 순간에도 메달을 생각한다. 사랑하는 이들을 '먼저' 쏘았던 것은 그들의 변한 모습을 견디기 힘들어서였다. 그래서 그녀는 싫어했던 사람일수록 아껴두었다가,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날 쏘았다. 이렇게 목표와 루틴에 따라 움직였던 그녀가 꿈꿨던 종착지는 단연 메달을 쟁취하는 단상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이승이 안된다면 저승에서라도 메달리스트가 되기를 꿈꿨다.
영광은 분명 존재한다. 영광의 좁고 동그랗고 하얗게 빛나는 영역 안에 걸어 들어가고 싶은 사람에게 영광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건 거짓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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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을 영광스럽게 쟁취하길 원했다.
그러나 진정 그녀가 원했고, 그를 극한의 상황까지 살게 한 욕망의 정체는 모호하다. 그것은 영광이었을까 승리였을까. 보통 승리는 영광을 목표로 한다. 따라서 영광이 승리보다 큰 위계를 갖는다. 그러나 사실 영광은 승리하지 않고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때로는 승리 외의 것으로 규정되는 영광이 더 고귀하다. 메달은 승리를 증명하지만 영광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패배시킬 대상이 부재한 세상 속에서, 그녀를 조금 더 살게 한 욕망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오래 훈련되고 프로그래밍된 '습관' 그 자체는 아니었을까. 무엇을 좇는지 모르고 달려온 삶이, 좀비화된 세상에서 멈춘 것이다. 결국 욕망의 정체가 실체 없는 습관이라는 것을 알게 된 정윤은 그제야 자신에게 죽음을 허락한 것일 수도. 역설적으로 죽음을 받아들인 그 순간 정윤은 자신의 삶을 소유한 것이다.
그렇다고 정윤의 욕망이 적절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존재 목적이 생존이라고 할 때, 생존을 가능케 한 유일한 요소가 그녀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이는 <지금 우리 학교는>의 청산이나 온조 아버지와 비교할 때,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들은 '사랑'하기 때문에 생존을 포기했다.
동양의 철학은 집착이나 욕망을 끊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불교는 심지어 그래야만 무분별한 윤회를 멈출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단 한순간이라도 욕망에 극적으로 다가서는 게 더 인간다운 것 아닐까. 욕망의 실체에 다가선 바로 그 순간 정윤은 가장 인간다웠고, 그래서 좀비들을 앞에 두고 기꺼이 죽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다른 관점에서 온조 아버지는 생명의 연장보다 딸을 살리는 것을 욕망했기 때문에, 적절한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나의 우선순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나는 실체 없는 허상들을 욕망으로 부르며 좇고 있지는 않은 지, 나를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욕망은 무엇인지를.
- 정세랑, <목소리를 드릴게요>, 아작(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