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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현 Jul 06. 2022

하루를 버는 일

예꿈 캠프(7/1-7/2)

시선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


 출석하는 교회에서 '예꿈 캠프'를 다녀왔다. 예꿈 캠프란, 예꿈부에 소속된 아이들 혹은 청년들이 담당교사와 함께하는 여행을 뜻한다. 예꿈부는 다양한 장애를 가진 이들을 아우르는 부서로 주로 청소년들이 다수를 이룬다. 나는 청년 교사 자격으로 캠프에 참가했으며 '교사 한 사람당 한 명의 친구를 맡는다'라는 원칙에 따라 열네 살의 준환이를 담당하게 되었다.


 한 달 정도 캠프를 두고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캠프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목-금의 야간 알바를 조정해야 했으며, 장애우를 돌본 경험이 전무했던 나로서는 이 캠프에 참가하는 것이 너무 벅찼다. 민우가 지나치듯 내게 참가를 권했고, 분명 그것이 무거운 부탁이기에 거절을 개의치 말라는 듯 지은 소탈한 웃음이 잔상으로 남았다. 그래서 윤민영 집사님께서 내게 예꿈 캠프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나는 이미 캠프에 참여하는 나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수원 은혜교회는 장애를 가진 친구들을 타인으로부터 '격리'하지 않는다. 그것이 소모임이나 심지어 예배일지라도, 성도라는 이름하에 모두는 함께한다. 인간의 하찮은 우월의식은 언어로 사람을 규정하고 가둔다. 누군가 장애인을 두고 '정상인과 다를 바 없다'라고 말했을 때, 이는 그동안 그의 머릿속에서 장애인이 '비정상인'으로 분류되어 격하되어왔음을 드러낸 것이다. 나 또한 이를 경계했다. 교회가 개척될 당시, 네 번째 증인이 되어줬던 이 또한 장애를 가진 분이었다고 한다. 이 교회의 기반은 그렇게 세워졌고 이를 기억하시는 담임목사님께서는 장애 사역에 대한 확고한 철학을 관철하신다. '절대 동정하지 않으며 우월한 위치에서 내려다보지 말 것, 그저 함께 할 것.'


수원, 탄도항

 두 가지 사건이 나를 확신으로 이끌었다. 첫째는 일 년 내내 움직이지 않던 편의점 근무 시간표에 균열이 간 것이다. 목-금으로 굳어진 근무는 일 년째 요지부동이었다. 평일 근무자 중 아무도 일을 그만두지 않았고, 이에 따라 다른 요일로 근무를 옮기려는 내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나 예꿈 캠프에 대해 듣게 되고 청년 교사로 이 캠프에 참가하고자 했을 때 월-화 야간 근무자가 일을 그만뒀다. 나는 여리고성에 무혈입성한 이스라엘 군대처럼 월-화 근무 자리를 쉽게 꿰차게 되었다. 일 년째 열리지 않던 문이 너무 쉽게 열렸다.


 둘째는 날씨다. 예꿈 캠프가 예정돼있는 주간 내내 비가 왔다. 그러나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이어져오던 비는 금요일, 캠프 당일이 되자 멈췄다. 열기를 머금은 비의 습기가 아직 남아있었지만 장마철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즐거웠고, 나의 뒤에 누군가 거한다는 든든함을 느꼈다. 나는 신앙인들의 과도한 의미 부여를 멀리하는 편이다. 마찬가지로 캠프에 내가 가야만 하는 '당위'를 신앙에서 찾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저 누군가와 연대하고 싶었다. 가치를 행하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었고, 그 틈에서 이 가치들을 안고 살아도 된다는 확신을 갖고 싶었다. 그러나 확신을 준 이는 다른 누가 아닌 당신이었음을, 어쩔 수 없이 고백한다.


바다향기수목원

 캠프의 일정은 간단했다. 첫째 날에는 대부도의 펜션에서 시간을 보내고, 둘째 날에는 주변 관광지들을 둘러보면 되었으니. 짝꿍과 함께 미션을 수행하거나 돌발행동에 대처해야 하는 등 부차적인 일들이 수반되었지만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우선 나의 짝꿍은 약간의 자폐증을 가진 정도에 불과하며 쌍둥이 동생과 함께라 정서적으로도 크게 안정된 편이었다. 첫날 캠프 내내 내가 걱정했던 것은 동생 시환이와 달리 어두웠던 준환이의 표정뿐이었다. 두 아이 모두 몸에 밴 단정한 습관들이 있었고, 이것이 민우와 나의 짐을 덜어주었다. 이따금씩 준환이가 큰 소리를 내긴 했지만 돌발스러운 상황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나는 어쩌면 '나 자신'을 걱정한 것일지도 모른다. 사역에 익숙했던 민우는 밝은 표정의 시환이를 즐겁게 놀아주었고, 비교적 미숙한 내가 준환이를 편하게 해주지 못하는 게 아닐까 걱정되었던 것이다. 아이들 모두가 밝게 웃는 표정의 사진을 부모님께 보내드리고 싶었다. '그저 함께 해달라'라고 부탁받았으나 나는 늘 그랬듯 너머의 것들을 해내는 것을 원했고, 어쩌면 이러한 시도가 좌절되어 내가 능력이 부족한 교사처럼 보일까 두려웠던 것일지도 모른다. 불손한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더 낮은 자세로 섬기지 못한 것과 나의 의를 드러내고자 했던 스스로의 모습을 읽었다. 부끄러웠다.


 속이 타들어가는 내 마음을 알았는지, 준환이는 다행히 저녁 일정부터 밝은 표정을 되찾았다. 쉬는 시간에는 우리가 지나온 장소들을 스케치북에 그려놓고는 펜션 곳곳에 전시해두었다. 그림 하나하나를 잘 살펴보니 수원에서 안산을 넘어오며 지나친 톨게이트라든지, 음식점 간판 같은 것들이 보였다. 순간을 포착해 오래 기억하는 능력도 대단했지만 무엇보다 내가 으레 지나치는 '덜 중요한 것들'에 아이의 시선이 머문다는 것이 새롭게 다가왔다. 출발할 때 들었던, '이 친구들의 몸은 불편할지라도 영혼은 누구보다 순수하다'라는 담임 목사님의 말씀이 이때 체감이 되었다. 소중한 경험이다.


시환, 누에섬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시환이나 주환이를 번갈아가며 돌보면서 가장 두려웠던 점은, 이 아이들의 마음을 다 읽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길을 걸을 때 힘들지 않은지, 어디 불편한 곳은 없는지, 어눌한 의사 표현으로부터 내가 놓친 것은 없는지 계속 고민이 되었고 의심스러웠다. 그래서 이 순수한 아이들이 행복하게 웃을 때 그렇게 많이 기뻤다. 이틀간의 짧은 일정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은 천국과 지옥을 수만 번 왔다 갔다 했으니 그 웃음 한 번이 너무 귀했던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아이들에게는 '오랜 시간에 걸쳐 훈육받은' 습관이 보였다. 핸드폰을 쓸 때는 알람을 맞춰달라고 아이들이 먼저 요청했고, 시간이 지나 알람이 울리면 어김없이 반납했다. 식사를 할 때면 수저를 상에 올려놓고, 잠자리에서는 정해준 음악을 네 번 듣고 잠에 들었다. 물론 예외적인 상황에도 어김없이 부모님의 흔적이 보였다. 이따금씩 준환이가 불안한 모습을 보일 때면 약간의 힘을 써서 진정시켜야 했는데, 그때마다 준환이는 저항하다가도 "선생님 때리면 안 돼"라고 말하며 스스로 평정을 되찾았다. 처음에는 교사인 내게 "때리지 말라"라고 요구하는 것으로 들려 적지 않게 놀랐으나, 행동의 맥락을 읽어보니 준환이가 무심코 선생님께 손을 올릴까 봐 부모님께서 교육하셨을 것이란 걸 알았다.


 밤늦게 찾아오신 목사님께서는 '우리가 부모님들의 하루를 벌어준 것'이라 말씀하셨지만, 아이들의 틈에서 부모님의 흔적을 읽을 때마다 나는 그분들이 이 하루를 위해 다른 날들을 가불 한 것임을 깨달았다. 내가 무엇이라고, 아이들과 부모님께 적선했노라 여긴 것은 아닌지 두려워졌다. 그리고 그 두려움만큼 아이들의 어머니가, 그리고 장애우 자녀를 둔 세상의 모든 부모님들이 아득하게 멀리 느껴졌다. 누구나 자신의 삶을 저울질한다. 그러나 이미 셀 수 없이 많은 무게 추가 달린 저울에 누가 무게를 재고자 할까. 내가 수없이 저울질했던 삶은 세상의 이면을 감추고 있었다.


 결국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물음으로 회귀한다. 말씀을 안다고, 신앙을 붙잡는다고 쉽사리 해결되지는 않는 것 같다. 수많은 타인들이 뒤섞인 삶 속에서 내가 생각하는 가치 있는 일들을 '가치 있는 방식'으로 해내고 싶다. 상인의 현실감각을 지성의 원천으로 두고, 또 한편으로는 바보같이 공부하고 싶다. 그리고 비로소 다다른 안식에서, 나는 당신의 품에 안겨 당신에게 오래 칭찬받고 싶다.



- 예꿈캠프,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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