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향옥, <야생차>
조향옥「야생차」
나는 있었습니다
살아 움직이는 모래를 보는 강가에서
별이 떨어져 모래알이 되었다고 믿는 강가에서
그냥 그대로 있었습니다
찻잔 속에 빠진 찻잎을 입술로 밀어내면
늘 흐느끼는 무엇을 느꼈습니다
아무도 말 걸지 않는 강가에서
달빛 마시고
모래가 그려 놓은 물결을 보며
그냥 있었습니다
시란, ‘언어의 속성을 바꾸는 일’과 같다고 느낀다. 최정란의 시 <프롤로고스>에 따르면 시인은 몰락과 죽음도 실패에서 성공으로 바꾸어 낸다. 죽음은 존재의 종말이라는 점에서 실패이나, 이를 시어로 가둘 때 죽음은 영원히 살 수 있다. 그리하여 죽음은 ‘끝, 해체’라는 속성에서 ‘시작, 또 다른 조합’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의 의의는 ‘시선’에 있다. 시어들의 조합이라는, 내가 창조한 세계에 거주할 이들을 선별하는 것이다. 일제의 폭력에 저항했던 시인들은 ‘순수와 이상’을 그들의 세계에 들였고, 전후의 작가들은 ‘고독과 가난’을 허락했다. 물론 시인을 시대와 꼭 결부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인의 시선이란 그가 보는 세상과 독립적일 수 없는 것이며, 그 시선은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갈 만하게’ 만든다.
이러한 관점에서 조향옥의 시 <야생차>는 야생의 찻잎에게 시선을 허락한다. 찻잎은 스스로를 쥐어짜 내며 ‘차’라는 존재의 의의를 획득한다. 이러한 찻잎의 존재 양식은 자신이 야생에서 획득한 수많은 성장의 결실들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실패’와 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강가에 ‘그냥 그대로 있었던’ 찻잎은, 스스로 사멸하지 않으면 어떠한 의미도 거두지 못한다. 그렇게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고 죽어가는 것이다. 찻잎에게는 스스로를 내어줄 기회를 부여받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죽음인 것이다. 조향옥 시인은 이렇게 야생차를 통해 죽음과 실패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을 전복시킨다. 그렇게 삶과 죽음이라는 언어의 속성은 시인의 세계에서 변화한다.
그의 세계에서 변화한 언어는 세계를 따뜻하게 만든다. 모래는 살아 움직이며, 모래알은 떨어져 죽고 난 뒤 별이 가진 새로운 존재 양식이다. 삶의 태동과 죽어서도 영원히 사는 자연사를 바라보며, 찻잎은 기다렸을 것이다. 누군가 자신을 알아봐 주기를, 그리고 그 누군가와 함께하기를. 그래서 찻잔 속에 웅크린 찻잎이 흐느꼈던 것은 그 오랜 기다림의 시간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찻잎의 생애를 바라보며 존재와 만남의 소중함을 되새긴다.
시인의 시야는 우리 같은 범인(凡人)들의 그것들을 넘어선다. 아주 작은 것들을 위한 시 한 구절이 내 삶을 더 의미 있어 보이게 한다. 작고 작은 찻잎에 향하는 따듯한 시선이, 누군가 내게 보내는 시선이 된다면 나는 이 삶을 계속 살아가고 싶을 것이다. 나는 조향옥 시인이 만든 세계에 기분 좋게 발을 디뎠고, 이제 시의 세계로부터 벗어나 선물 같은 나의 일상을 돌려받는다.
주의 깊게 시 한 편을 읽고 난 뒤에는 늘 시인이 붙잡은 단상이 어렴풋하게 떠오른다. 시인은 차를 마시며 시상을 떠올렸을까. 아니면 찻잎이 자라는 어느 계절과 자연의 틈에서 시상을 붙잡았던 걸까. 그래서 차를 마시는 그 순간에, 이미 붙잡았던 시상을 되새긴 것일까. 내 생각에는 후자일 것 같다. 시인은 자신이 속한 세계를 오래 관찰하는 습관이 있으며 이미 떠오른 야생의 찻잎이라는 시상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기어이 야생차를 마시는 순간, 시는 탄생한다. 그리하여 시는 종이에 갇힌 활자를 벗어나 시인의 시상과, 생각과, 철학과, 삶의 온도가 된다. 시인이 마셨을 야생차는 아주 뜨겁지도, 그렇다고 차갑지도 않은 따뜻한 온도를 지녔을 것이다.
- 조향옥, <야생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