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유석, <쾌락독서>
한 줄의 문장, 또는 한 단어가 기억에 남아있다면 내게 그 책은 그 한 줄, 또는 한 단어이다. 만약 책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데 그 책을 읽던 시간과 장소의 감각이 되살아난다면 내게 그 책은 감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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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들은 그저 그 시기에 거기 있었기에 우연히 내게 의미가 있었을 뿐이다.
수년 전까지, 출판시장의 흐름을 주도했던 사조는 '인문학'이었다. 특히 고전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커지며 '고전 읽는 법'이나 '서양 철학 요약집'과 같은 일종의 참고서들도 덩달아 흥하기 시작했다. 인문학의 수요가 비단 한국에서 늘었던 것인지, 그리고 이를 활용하는 방식이 어떠한지에 대해 타국과 비교를 시도해보지는 않았다. 다만 속도가 중요한 나라답게 '참 빠르고 효율적이게 인문학을 소비하고 있다'라고 느낄 뿐이었다.
많은 이들이 인문학 전문가를 자처했고 유비쿼터스를 활용한 무수한 챌린지들도 젊은 세대의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 했던가. 시장의 영원한 강자일 것 같던 인문학은 점차 세력을 잃어갔다. 정확히는 인문 고전은 명문의 자리를 유지했으나, 인문학 열풍의 인기에 편승해 방법론을 파는 '도매상'을 자처했던 이들은 자취를 감췄다.
이들은 인문학 만능주의를 설파하며, 인문 고전을 읽는 것이 이 세계의 비밀을 깨우치는 성공의 지름길인 양 광고해왔다. 그러나 인생은 늘 결과로 답한다. 그들의 '비기'에는 뒤따르는 간증이 없었다. 오히려 출판시장에서 인문학 열풍의 뒤를 이은 것은 '-도 괜찮아' 식의 위로를 담은 에세이었다. 인문학은 성공으로 향하는 욕망의 사다리로서는 오래 기능하지 못했다.
이 책에 따르면 인문학을 위시한 성공 담론의 실패는 첫째, 기필을 버리지 못해서 그리고 둘째, 자기 본질을 잃었기 때문이라 판단된다. 문유석 작가는 책을 '깃털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책의 출판 당시에도 큰 영향력을 떨쳤던 인문학 마케팅, '지금 바로 인문학을 읽지 않으면 경쟁에 도태될 것처럼 떠드는' 이들은 이러한 주장을 거스른다. 그럼에도 그는 단호히 말한다. 강박을 내려놓으라고.
그거 안 읽는다고 큰일 나지 않는다. 반대로 그거 읽는다고 안될 게 되지도 않는다. 얼마나 유명한 책을 읽었든 지금 내 기억에 남아있는 것이 없으면 최소한 현재로서 존재하지 않는 책이다.
인간 세상이 언제나 그렇듯 내가 절실하게 선망했던 것이라 하여 누구에게나 같은 무게를 갖는 것은 아니다.
그의 주장은 간단하다. 책에 대한 과도한 선망과 기대를 내려놓고 그저 읽으라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 존재했던 책들은 그저 그 시기에 거기 있었기에, '우연히' 내게 의미가 있었을 뿐이다. 그리하여 책은 각자의 삶을 담기에 무게도 의미도 각기 다른 것이다.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그 우연히 얻어진 삶의 기록이다. 책이 내게 남긴 한 줄의 문장 또는 단어, 어쩌면 시간이나 공간의 감각이 그것이다. 그 이상의 것은 선택의 사항일 뿐 의무가 될 수 없다. 기필을 버려야 한다.
나아가 작가는 '삶의 자세'에 대해 말한다. 책의 본질은 목적이 아닌 수단이다. 목적은 삶이 되어야 하고, 당연히 글보다 삶이 더 크다. 우리는 이 대전제를 잊고 지낸다. 지면을 떠나 부유하는 문장들을 쟁취하는 것은 자기 몫의 경험을 통해서다. 유시민 작가는 "훌륭한 생각을 하고 사람다운 감정을 느끼면서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그런 삶과 어울리는 글을 쓸 수 있게 된다. 기술만으로 쓴 글은 누구의 마음에도 안착하지 못한 채 허공을 떠돌다 사라질 뿐이다."라고 말한다. 글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글을 받아들이는 데도 경험이 필요하다. 공감의 깊이는 삶의 두께에 비례한다.
독서와 학습은 구분되어야 한다. 활자에 담긴 이야기는 결국 각자의 욕망과 감정이 투영되어 있다. 작가의 욕망이나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이를 관조하며 내 삶과 견주어 비교하고 의심해야 한다. 결핍을 안고 살아가는 같은 인간인 처지에, 무결점의 지위를 작가에게 넘겨주어서는 안 된다. 그가 아무리 위인일지라도 말이다. 글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메시지는 명확하다. 책에서 '삶의 정답'을 찾지 말라는 것이다. 각자의 삶의 정답은 문제를 풀듯 책에서 공식처럼 얻어질 수는 없다. 수만 번의 고민이, 수천번의 깨달음이 당신의 삶에서 유효한 '나름의' 방법을 안내할 뿐이다. 원래 삶이란 내 손에 잡히지 않은 채 잠시 스쳐가는 것들로 이루어졌지만, 그래도 순간순간 눈부시게 반짝거린다. 시냇가에서 사금석을 채취하듯 책을 털어내라. 그리고 삶을 채워라.
- 문유석, 쾌락독서, 문학동네(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