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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현 Oct 18. 2021

침묵은 언제나 옳은가

홍상수,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2012)
절대적인 진실 같은 것을, 살아있는 사람과의 만남 속에서 체험하고 싶은거?
그런거 아닌가?

#고독 #주체 #책임 #언어


 홍상수 감독의 열네 번째 장편영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은 문제의 역작이라는 표현이 옳을 것 같다. 화려했던 스캔들 덕택에 그의 작품들 또한 관객들에 의해 재평가되었으며, 그를 잘 알든 그렇지 못하든 그에 대해 한 마디씩은 던질 수 있을 정도로 그를 파악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홍상수 감독은 평론계 전반에서 상당히 능력 있는 감독으로 정평이 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구조주의에 기반한 에세이 필름적 실험 기법은 관객이 직접 영화를 해석하고 해체하는 데 능동성을 갖게 함으로써 불편한 새로움을 선사했다.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도 2013년 2월에 열린 제63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경쟁 부분에 초청되었다는 점에서 절반 이상의 성공을 거둔 셈이다.



영화에서 해원은 고독을 마주한 주체적인 여성으로 묘사된다. 영화는 지속적으로 죽음과 고독의 시각적 이미지를 제공하고 해원이 이와 맞서는 형식의 대결구도를 보여준다. 반복해서 꿈을 꾸는 그녀는 도서관에서 잠들기 전에 <죽어가는 자의 고독>을 읽었으며, 고서점에서는 에밀 졸라의 <쟁탈전>을 만지작거렸다. 결정적으로 해원은 서촌과 남한산성 등 과거 조상들의 죽음으로 이어진 공간을 배회한다. 더불어 해원의 엄마 진주는 “사는 건 하루하루 조금씩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이라며 아예 죽음에 직접적으로 언급한다.


 따라서 죽음에 대한 영화의 주제의식이 해원을 통해 드러남은 알겠다. 그러나 고독은 또 무엇인가. 해원은 고독을 두려워한다. 캐나다로의 이민을 통보한 진주와의 단절된 모녀관계, 그리고 해원이 다니는 대학의 교수이자 영화감독인 유부남 성준과의 연인관계로부터 그녀는 홀로 남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물론 해원은 진주나 성준에게 그러한 고독에 대한 두려움을 알리지 않는다. 다만 두 번의 꿈을 통해 고독을 탈피하고 싶은 욕망을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서촌에서 제인 버킨을 만나는 것과 꿈에서 중원에게 청혼을 받는 것은 두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은 욕망이 형상화된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영화가 연출하고 해원이 수행한 주체적인 인간상은 과연 어떻게 해석될  있을까. 해원은 주위로부터 ‘특별하다거나 ‘남들과는 다르다 평가를 받는다. 그도 그럴 것이 해원은 속내를 감추는 여자다. 동기인 재홍과 아무런 마음도 없이 밤을 함께 보내는 한편 연인인 성준에게 집착하지 않는다. 처음 만난 중원의 청혼을 깊이 고민하는  또한 이와 같은 양상이다. 해원은 결혼에 대해서도 관계에 대해서도 어떠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는 홍상수 감독의 이전 영화들에서 등장한 무책임한 남성들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무책임은 구조주의 이론의 기반인 소쉬르의 언어철학을 통해 정당화된다. 소쉬르에 따르면 ‘랑그(langue)’는 언어의 상이한 가치체계를 뜻하며, ‘파롤(parole)’은 같은 언어체계에 놓인 구성원들의 구체적 발화를 뜻한다. 랑그는 파롤의 전제가 되는 규범이다. 그러나 랑그는 규범일 뿐 동일한 기의는 상이한 기표들을 취할 수 있다. 한 기의가 특정 기표들을 보유하도록 명령할 어떤 것도 사물의 본성에 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해원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그녀에게 결혼은 다른 이들이 인식한 언어 개념과는 사뭇 다른 것으로 보인다. 해원은 결혼을 처음 만난 이와 할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 반면, 다른 이들에게 결혼은 평생의 반려를 구할 무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표와 기의가 자의적이기 때문에 해원은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일까. 당신은 그러한 삶을 응원할 수 있는가. 적어도 나는 그렇지 않다.


 언어는 현상을 모두 담을 수 없지만, 그것은 세상의 당연한 이치일 뿐이지 그 사실을 차용해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해원은 자신의 고독만이 중요했을 뿐 그녀 자신이 집단의 규범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타인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 이유도 없이 관계가 단절된 재홍과, 해원과 함께 규범을 넘나들었지만 책임을 질 수 없었던 성준의 고독이 이에 해당한다. 물론 자유로워지기 위해 외로운 딸을 떠났던 진주의 무책임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대개의 철학들이 쓰이는 바에 따라서 ‘그럴듯하게’ 들린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침묵하라”라고 말했을 때, 이는 누군가의 생각을 지배하고자 할 때도 쓰일 수 있고 이를 반박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쓰일 수 있다. 해원은 침묵함으로써 고독에 저항했으나 이는 순전히 자신을 위한 일이다. 때로는 말함으로써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을 다할 필요가 있다.



- 홍상수,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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