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과 사람
#일상 #공병 #폐지
코로나 19가 휩쓴 일상 속, 잠시 거쳐 가리라 여겼던 편의점 야간 알바는 벌써 두 해째를 맞았다. 여러 불가피한 이유가 존재했지만 나는 이 일을 사랑한다. 밤을 보내는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달라서, 익숙한 대면 속에서 뜻밖의 의미를 찾아서, 폐지를 줍는 어르신들을 도울 수 있어서, 그리고 밤새 공병을 줍는 고된 손에 동전 몇 푼을 쥐게 해 드릴 수 있어서.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꺼내보고 싶었다.
일은 고되다. 학비를 벌기 위해 일하는 대학생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그러나 나는 시간을 파는 쪽을 택했다. 나의 고됨은 뜬눈으로 밤을 보냄으로써 밤낮을 몇 번이고 바꾸는 데 있다. 밤이 선생이라 여겼던 탓에 몸은 힘들지만 나름대로 시간을 잘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일하는 편의점에는 몇 가지 불문율이 있다. 업무적 이해도나 규칙들을 말하는 게 아니다. 하루에 두 번 폐지를 가지러 오시는 할머님을 웃으며 맞이하는 것이다. 아쉽게도 다른 할머니는 안된다. 오전 여섯 시가 되면 편의점 앞 낙엽을 쓸어 가시고, 밤새 일 한 대학생 알바들에게 응원을 보내주시는 바로 그분에게만 우리의 폐지를 줄 수 있다. 편의점의 규모가 큰 탓에 많은 양의 폐지가 발생한다. 따라서 다른 경쟁자들은 호시탐탐 이를 노리고 일을 새로 시작하는 알바들을 표적으로 삼기도 한다. 뜻하지 않게 웃는 얼굴의 할머님께 폐지 한 장도 전해주지 못했던 근무 첫날의 새벽이 떠오른다.
두 번의 계절을 지날 동안 이 편의점 씬에서 내 이목과 마음을 강탈한 미장센은 역시 공병과 폐지다. 모두 밤을 사는 사람들의 다양한 초상들을 담기 때문이다. 공병을 교환하러 오는 사람들은 두 부류다. 술을 마신 사람과, 술 마신 사람들의 것을 가져오는 사람. 대개 전자는 수용할 수 있는 양을 초과해서 가져온다. 집에 술을 쌓아두고 마시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여겼는지 상자나 봉투에 가득 담아 가져오는 것이다. 이때 나는 집 냄새와 음식 냄새가 섞인 공병들을 계산적으로 계수한다. 후자는 보통 폐지를 가져오시는 분들과 겹친다. 낮부터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폐지를 줍고 겸사겸사 술판을 벌인 사람들의 공병도 줍는 것이다. 코로나 19로 인해 밤사이 편의점 앞에서 벌어지는 술판이 줄었지만, 어디서 그렇게 찾아오시는지 공병은 늘 주류 박스를 한가득 채우게 된다. 다만 나는 공병과 폐지를 주워오는 분들을 뵙는 게 늘 불편하다. 나의 시간과 그들의 시간에 책정된 값이 다른 탓이다.
8,720원 × 9시간=78,420원. 내가 밤을 보내는 데 책정된 값이다. 그 시간은 책을 읽거나 앉아서 조는 등의 업무와 하등 관계없는 일들로 채워져도 상관없다. 나의 성실함이나 태도는 물론 중요하지만, 업무를 그만둬야 할 정도의 귀책사유가 아니라면 내가 받을 일당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밤사이 공병을 줍고 폐지를 줍는 이들의 시간은 어떠한가. 분초를 다퉈 경쟁자들로부터 파한 술자리의 공병을 쟁취해야 하고, 마찬가지로 남보다 먼저 폐지를 주워야 한다. 때로는 우리 할머님과 같이, 수성해야 할 편의점 앞의 낙엽을 쓰는 일종의 ‘로비’가 필요할 때도 있다. 그렇게 치열한 현장을 목도했으니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나와 같은 밤을 보낸 그분들께 드릴 수 있는 것은 아주 작은 친절, 그리고 웃음뿐이다.
다시 겨울이 올 것이다. 삶이 늘 그렇듯이 계절은 더웠던 날의 열기를 앗아가고 새 찬 바람으로 돌아오며 순환할 것이다. 그러나 그 바람이 아주 춥지는 않길 바란다. 밤새 공병을 줍고, 폐지를 찾아 떠나는 이들을 위해서라도.
- 정자동의 어느 골목에서,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