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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현 Oct 10. 2022

찬란한 ‘생(生)’

이병률, <찬란>

@Ray Hennessy, Unsplash

찬란

이병률(1967~)


겨우내 아무 일 없던 화분에서 잎이 나니 찬란하다

흙이 감정을 참지 못하니 찬란하다


감자에서 난 싹을 화분에 옮겨 심으며

손 끝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를 듣는 것도

오래도록 내 뼈에 방들이

우는소리 재우는 일도 찬란하다


살고자 하는 일이 찬란이었으므로

의자에 먼지 앉는 일은 더 찬란이리

찬란하지 않으면 모두 뒤쳐지고

광장에서 멀어지리


지난밤 남쪽의 바다를 생각하던 중에

등을 켜려다 전구가 나갔고

검푸른 어둠이 굽이 쳤으나

생각만으로 겨울을 불렀으니 찬란이다


실로 이기고 지는 깐깐한

생명들이 뿌리까지 피곤한 것도

햇빛의 가랑이 사이로 *북회귀선과

*남회귀선이 만나는 것도

무시무시한 찬란이다


찬란이 아니면 다 그만이다

죽음 앞에서 모든 목숨은

찬란의 끝에서 걸쇠를 건져 올려 마음에 걸 것이니


지금껏으로도 많이 살았다 싶은 것은 찬란을 배웠기 때문

그러고도 겨우 일 년을 조금 넘게 살았다는

기분이 드는 것도

다 찬란이다



 내가 이병률을 아는 것은, 그가 썼던 여행 산문집을 읽었기 때문이다. ‘바람이 분다’는 현상과 ‘당신이 좋다’는 마음이 한 문장으로 잘 어우러진 책 제목은 언어와 사물에 대한 그의 탁월한 감각을 설명한다. 그는 바람을 보며 사랑하는 이를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다. 화분에서 잎이 나는, 지극히 일상적인 일조차 ‘찬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그는 따뜻한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다시 생각해본다. 그가 따뜻한 사람이기에 이 모든 것이 찬란한 것인지, 세상사는 그 자체로 찬란한 것인지를 말이다. 놀랍게도 나는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찬란하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나는 ‘기필코’ 살아내지 않는 것들은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했다. 생의 의지는 기필코 얻어내는 것들에서 찾을 수 있다고 여겼다. 열렬한 사랑이, 노력 끝에 맺어지는 결실이 그러했다. 그래서 내 눈에는 사람만이 보였다. 인간 존재가 이루어낸 무궁한 역사와 무수한 이야기만이 눈에 이끌렸다.


 그러나, 도처에 의지가 넘쳐난다. 작은 화분 안에서도 생을 소멸하려는 겨울의 매서움과, 이를 이기고 잎을 피워내는 생의 강력한 의지가 혼동한다. 사실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찬란의 끝에서 걸쇠를 건져 올려 생(生)에 내걸어진 것이다. 그래서 내일 아침에 내가 눈 뜨는 일도, 잎의 끝이 상하지 않는 일도 찬란인 것이다. 모든 생명은 찬란한 유산이다.


 기필코 살아내는 아름다움은 오히려 인간에게 부족하다. 나는 생을 걸고 하루를 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의 매 순간이 생을 위한 투쟁인 것을 나는 저 잎으로부터, 검푸른 어둠으로부터 보았다. 어쩌면 인간에게 허락된 아름다움은 삶의 기필보다, 죽음과 싸우는 모든 존재들의 짐을 덜어주는 사소함에 있다. 그렇게 우리는, 연약한 존재들의 곁에서 찬란함을 나눠 갖는 것이다.


 이제 나는 내가 마주할 모든 것들을, 그리고 내가 살아가는 모든 날들을 찬란으로 대하려 한다. 그리고 그 모든 찬란의 중심이 내가 아님을 깨닫고, 내게 허락된 순간을 겸손하게 살고자 한다.



- 시집을 건네며,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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