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꿈꿨던 직업들

정치부 기자에서 해외영업, 그리고 콘텐츠 마케터까지

by 인현

어릴 적부터 어른들 대화에 껴들기 좋아했다. 껴들지 않더라도 속으로 공감하거나 논박하며 나름의 입장을 견지해나갔다. 그리고 18대 대선 행보가 한창이던 2012년 어느 날에 나는 꽤 비장한 다짐을 했다. 평생 타인의 세계에 껴드는 직업을 갖자고 말이다. 그리고 그 다짐으로 인해 기나긴 방황을 하게 됐다.


지키기와 심판론이 각축을 이뤘다. 전자의 축에는 국정원과 퍼스트레이디가 있었다. 당시 국정원은 민간인 여론조작팀을 운영해 선거에 직접적으로 관여했고 퍼스트레이디는 그 수혜를 누렸다. 대선 직전에 이루어진 여론조작 행위에 대해 언론은 가치판단을 미뤘고, 경찰은 대선을 이틀 앞두고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퍼스트레이디는 마지막 후보자 토론회에서 공표되지 않은 수사 결과를 언급하며 선거판을 흔들었다.


공표 금지일 전 마지막 여론조사에서 그녀는 상대 후보에 뒤처져 있었다. 한참 후의 일이지만, 국정원과 경찰청 뿐 아니라 국방부의 개입이 밝혀졌다. 국정원장은 최종적으로 5년형을 확정받았다. 선거판은 사안의 진실과 반대로 요동쳤고 그녀는 원하던 결과를 얻었다.



베토벤의 마지막 현악4중주 16번 F장조

정치부기자


논점을 이탈할까 봐 최대한 가치판단을 배제하고 적었다. 격랑 속의 선거판을 지켜보던 나는 중학생이었다. 그때 정치부 기자가 되리라 다짐했다. 중2병 말기라 그랬는지, 운명이라고 느낄 만큼 강한 감정을 느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아침마다 두 신문사의 헤드라인과 사설을 읽었다. 하나는 동원고등학교 1층 복도에서 챙긴 동아일보, 하나는 경향신문이다.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고 배웠고 그렇게 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당시 국회에는 기자 출신 국회의원이 많이 포진해있었다. 동아일보를 읽으며 DJ 전담으로 통했던 기자에 대해 알게 됐다. 후에 그는 전라남도 도지사를 거쳐 국무총리가 되었다. 그 뒤 행보는 그말싫지만, 그와 손석희를 롤 모델로 삼고 수험 생활에 돌입했다. 목적지에 준하는 결과를 얻으려면 최상위권 대학교의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해야 할 터였다.


그러나 나는 경로설정에 필요했던 것만큼 강한 다짐으로 수학을 포기했고 논술을 독학으로 준비했다. 그래야만 했나? 나는 마치 베토벤이라도 된 양 ‘그래야만 한다(Es muss sein)’고 생각했다. 중2병이 안 고쳐졌다. 논술로 최상위권 대학에 진학해야만 인정받는 언론인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동원고등학교는 공부로 꽤 알려져 있었고 특히 이과가 유명했다. 학생 수가 530명 정도 됐다. 문이과 통합이던 1학년 때 1등급 끄트머리로 교과 우수상을 받았기 때문에 기억한다(안 믿겨서 등수를 계산해 봤다). 공부량을 국영탐에 몰빵해서 받은 점수였기 때문에 교과로 최상위권을 가지는 못할 거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수포자가 됐고 논술에 몰빵했다. 가능성을 지레 짐작했고 스스로를 과소평가했다. 이 선택을 오래 후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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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기록과 기고문

국영탐 내신은 2학년까지 2등급 정도를 유지했고 수능 직전 모의고사에서 국어와 사탐 과목이 1등급이 나왔다. 계속해서 논술을 혼자 준비했다. 신문 사설을 스크랩하고 독서록을 썼다. 최상위권 대학의 논술전형 수능 최저등급을 맞출 자신이 넘쳤다. 그러나 수능에서 거짓말처럼 국어를 조졌고 멘탈이 나갔다. 재수, 삼수를 했지만 불면증과 우울증이 겹치며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논술 최저를 맞추지 못해 시험을 치러 가지도 못했다. 논술 최저가 없는 아주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논술전형에 응시했으나 최초 예비 3번으로 떨어졌다. 지속되는 실패를 기점으로 내가 정한 ‘그래야만 했던’ 경로 설정은 무너졌다. 나는 정석 루트로 엘리트가 될 수 없었고 학벌이 중요한 기자 사회에 페널티를 안고 진입하기는 싫었다. 자존심이 상해 원서를 넣지 않았지만 가족들의 설득 끝에 2차 지원을 통해 한신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에 진학했다. 내가 생각한 시작을 밟지 못했기에 언론 기자의 꿈은 셀프로 좌절되었다.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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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기록, 2021~2022

극도로 불안하고 상념이 많던 나날 속에서도 글을 계속 썼다. 짧았던 독일 유학 중에도, 군대에서도. 전역해서는 편입 논술을 알게 되어 또다시 꿈을 꿨다. 당시 연세대학교와 고려대학교만이 편입 논술 전형을 시행했다. 나는 이십 대를 판돈으로 걸어 다시 논술을 공부했다. 독학으로 정보를 얻을 수가 없어서 학원을 등록했고 야간알바와 토익학원 조교를 병행했다.


판돈이 커졌기 때문에 욕망도 커졌다. 학원에서 같이 공부를 하던 이들은 연고대 로스쿨 진학을 꿈꿨다. 나는 항상 그들보다 훨씬 좋은 답안을 써냈다. N수 경력이 있는 이십 대 중반의 수도권 대학생은 허영심이 커졌다. 그들은 서성한이나 중경외시 라인이었고 합격 후에는 자교 선발로 로스쿨을 노리는 모양새였다. 나는 존재하는 차이를 무시했다. 오랫동안 상한 자존심도, 주위의 의심도 단번에 역전시키고 싶었다. 메타인지능력이 박살 나서 부모님에게 연고대 편입학 후 로스쿨에 진학해 변호사가 되겠다고 말씀드렸다.


수단이 목적을 집어삼켰다. 처음에는 정치부 기자가 되고 싶었으나, 이미 내가 생각한 당위성 가득한 경로는 무너졌다. 진로를 재탐색하지 않고 그저 글자 속에 살았다. 결과적으로 두 해에 걸쳐 연세대학교 편입 논술 전형에 두 번 합격했다. 그러나 서류전형 끝에 최종 예비 2번으로 탈락했다. 메타인지능력이 회복됐다. 이번 생에 변호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인정했다. 이십 대 후반에 돌입하기 직전 나는 급하게 인천대학교 무역학부에 진학했다.


해외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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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마루, 옥우석 교수님

파묻혔던 글자들도, 끄적이던 리트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미련이었다. 이십 대를 다 보내며 캠퍼스에서 소속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좋은 친구들과 도전이 가득했지만 언젠가 떠날 곳이라 여겼다. 다행히도 옥우석 교수님과 맨마루를 만났고 GTEP 활동을 시작했다. 무역이라는 글로벌 무대에서 내 한편의 자리를 만들어내고 싶어졌다. 오랫동안 틈틈이 영어 공부를 해둔 덕에 어느 정도 읽고 말할 줄 알았다.


정치부 기자가 된다면 특파원을 꼭 지내고 싶었기에 GTEP 활동을 통해 마주한 기회에 들떴다. 두바이에 가서 의료기기를 팔고, 할랄푸드의 동남아 수출 판로를 찾기 위해 부르나이 업체와 미팅을 했다. 그 즈음 인생은 당위성으로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시냇물처럼 흘러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 흘러감을 비로소 인정했다. 물살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현재, 졸업을 거의 했다. 요건을 모두 갖춘 유예 상태라 ‘거의’라고 표현해 본다. 지난 몇 년간 실패감과 후회가 가득했던 탓에 마땅히 해야 할 것들을 잘 해내지 못했다. 반성한다. 무역인을 꿈꾼다면 필수적으로 따야 했던 자격증도 놓쳤고 학점도 잘 챙기지 못했다. 그러나 수많은 경험을 했고 이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강물에 여러 번 뛰어든 결과였다. 그 자세에 대해서만은 스스로를 존중한다.


콘텐츠 마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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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쿤데라, 박웅현, 박현인 렛츠고

냉소주의는 삶을 피폐하게 만들 뿐이다. 잠시 세를 얻을 수 있겠지만 끝내는 속이 없는 강정이 될 뿐이다. 입장을 정하지 못하면, 본인의 색을 얹지 못하면 스스로 설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현실 정치에 대해 뚜렷한 노선을 둔 까닭이고 중도를 표방하는 이들을 경멸하는 이유다. 그래서 스스로의 삶에 냉소적이었던 모순을 반성한다.


현실로 돌아와, 내가 원하는 직무에서 서류 탈락을 반복하고 있다. 어학과 경험을 주장해왔지만 학점이 낮고 자격증이 부재해 전문성을 어필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넋 놓고 상반기를 날려버릴 수는 없었다. 직무를 넓혀 열정적으로 서류를 *점사했다. 난 두 개의 대학을 다녔고 전공이 다른 비동일계 편입을 경험했다. 스스로를 문화콘텐츠, 무역 복수전공자라고 생각한다.


*사격 기술로서의 점사는 사수가 기관총을 비롯한 전자동 화기를 적절히 조작해 적절한 수의 탄환을 목표로 한 지점에 짧게 쏟아붓는 것이다. 대단할 것 없는 기술이다.


학점이 낮다고, 자격증이 없다고 스스로에게 냉소를 보낼 수는 없다. 서류 탈락을 반복해도 어쨌든 탈출구를 마련했다. 그 과정에서 IT 기업의 콘텐츠 마케팅 직무에 서류 합격했고 근무지를 비롯한 여타 조건도 굉장히 마음에 든다. 콘텐츠란 소통의 매개체이다. 콘텐츠를 전공하며 주로 영화 이론 수업을 들었다. 영화는 현실 세계에 적을 두지만 이상을 표방한다. 그 가운데 생기는 틈과 부조화가 소통이 필요한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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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X 서류합격

나의 독서 경험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이는 단연 박웅현이다. 그가 좋아하는 책을 골라 읽었고, 그가 했던 고민의 경로를 따라가려 애썼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부분적으로 사람을 알 수밖에 없다. 그에 대해서 또한 그렇다. 그가 가진 광고인으로서의 권위와 현실을 살아가는 타성이 현재 내가 그에게 바라는 감수성에 맞지 않는다고 불평할 수는 없다.


그래서 ‘부분적으로’ 그의 조언을 즐겁게 받아들였고 당위성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취준 단계에서도 그 느낌을 잃지 않고 넓게 직무를 바라봤다. 그가 신문기자와 광고기획자를 두고 선택의 범위를 폭넓게 두었듯이, 나도 해외영업과 마케팅을 꼭짓점으로 달았다. 두 직무는 앞서 말한 ‘소통’의 영역에 속한다는 점에서 같다. 전자는 보다 직접적인 소통이고, 후자는 간접적이다.


해외영업 인턴 경력이 실무로 인정된다는 것이 강점이다. 러프하게 해석해도 나는 영업가이자 마케터로 일했다. 물론 이후 치뤄진 역량검사가 내게는 매우 어려웠고 앞으로의 행보에 빨간불이 켜진 듯하지만 기회가 닿는 곳까지 노력할 것이다. 잡스가 말했던 ‘Conneting the dots’, 박웅현의 ‘기필을 버려라’,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해석한 나의 인생은 더 이상 후회스럽거나 두렵지 않다.



15년 전의 다짐에 답하고 싶다. 그래야만 했는가? 절대 아니다. 이상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그렇다.


이상을 목표로 살아가는 삶은 물론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공해를 일으켜서는 안 된다. 풍차를 향해 달려가는 돈키호테는 글자로 박제된 책속에서나 영웅일 뿐이다. 그리고 그가 사는 현실 속에서도 그에게 영웅이 되어달라고 말한 이는 없었다. 그저 그가 영웅이 되고 싶었을 뿐이다.


고백하건대, 정말 오랫동안 정치부 기자가 되는 것이 운명이라고 여기며 살았다. 그것이 실패했더라도 좌절된 운명이라 생각했다. 언론의 불균형, 거대 권력 앞의 무력감 등 삶을 걸어 상대하고 싶었던 나의 적수는 실제로 존재할지라도 허깨비가 됐다. 이제 내 눈앞에는 너무도 명백한 해결과제가 있다.


불합리는 존재해왔고 존재할 것이다. 다만 내가 싸우는 방식이 ‘글’일 필요는 없다. 좋은 콘텐츠를 만들어 불합리한 일들을 불합리하다고 말할 수 있는 올곧고 용기 있는 마음을 재생산할 수도 있다. 다른 어떤 방식도 싸움을 걸어 볼 여지는 있다. 그러니 요동치는 나의 삶이 더 이상 푯대를 잃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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