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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현 Nov 16. 2021

서촌에서 바라본 ‘죽음’과 삶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을 기억하며

 영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에서 홍상수 감독은 이제껏 외면해왔던 다른 시선을 대중들에게 드러낸다. 그것은 바로 ‘노동과 역사의 시간’이다.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이 세상에 나오기 전, 홍상수 감독은 특유의 영화적 기법인 반복과 은유를 통해 인물의 욕망을 영화에 드러내는 것으로 현실과 조우하였다. 이때 개인의 욕망은 시대와 결부되지 않으며 주로 남성의 성적 판타지로 수렴된다. 그러나 이 영화를 기점으로 그는 ‘여성’을 내세워 존재의 본질을 향해가는 여정을 그린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존재의 증거인 역사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안긴다.


 물론 여전히 남자들은 욕망을 감추지 않는다. 그러나 해원은 자신을 욕망하는 남성들 틈에서 죽음이라는 본질에 대한 탐구를 멈추지 않으며, 그들에게 휘둘리지 않는다. 물론 그 과정이 무책임해 보이고 다소 받아들이기 어려울 지라도, 삶의 본질과 근원을 찾는 두렵고도 슬픈 시도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으며 고귀한 것이다.


 영화는 죽음의 이미지를 강조함에 있어 서촌이나 남한산성과 같은 고고한 장소를 선택하였다. 이는 세속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고풍스러운 배경을 두고 선조들의 노동과 삶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해원의 삶은 선조들의 수동적인 노동의 결과물을 통해 위로받고 있다. 맹목적인 노동에 의미 없이 스러져갔을 삶들이 후대에 또 다른 의미를 선사하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이 내가 서촌에, 그리고 남한산성에 다녀간 이유이다. 삶으로 이어진 죽음의 의미라는 것을 느껴보고 싶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숨결을 느끼고 싶었다.



서울, 2021

#역사기행 #서촌 # 정동길 #경복궁 #덕수궁


경복궁

 하루를 온전히 써 참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경복궁, 숭례문, 덕수궁, 서촌, 정동길, 백범공원, 서대문 공원, 한양 도성 등을 다리가 아프도록 걸었다. 경복궁은 최초 공사 당시 한 차례 불에 탔고, 재차 공사할 당시에는 여건이 전보다 더 좋지 않았다고 한다. 당연히 백성들의 불만은 더 커졌을 테고, 그럼에도 ‘대의’를 위해 노동력을 희생당했을 것이다.


 어렵게 완공된 경복궁은 여러 차례 수난을 겪고 복원되며 현재 서울의 중심에 섰다. 그 일대기를 차근차근 거스르다 보니, 홍상수 감독이 서촌과 남한산성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바들을 알 수 있었다. 선조들의 스러져갔던 삶과 노동력은 후대에 이르러 경탄의 대상이 된다. 때로는 과정보다 의미 있는 결과가 있을 수 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생각하며 얻게 되는 억지스러울 정도의 숭고함은, 죽음이 어찌 삶의 위로가 될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우리는 누군가의 삶을 단 하나의 시선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것이다.


덕수궁, 정동길

 가장 큰 울림은 덕수궁과 정동길에서 느꼈다. 고고한 전통 문양과 현대적 건축 양식들이 한 데 모인 덕수궁은 변화하는 시대의 분위기를 오롯이 담고 있었다. 그 분위기로부터 혼란과 기대를 동시에 느낀다.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고 자신할 수 없는 시대의 연약한 나라의 왕과 백성들을 떠올렸다. 그 연약한 나라의 왕은 어리석고 어렸다. 그를 평가한 많은 책들이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박제된 몇 문장으로 그에 대한 평가를 다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그의 일대를 담은 장소들을 내 발로 걸으며 그를 아노라 말하고 싶었다.


 고풍을 갖추었으며 한적했던 덕수궁의 모습은 그의 삶과 닮아있다. 근대 건축 기술과 조선의 전통 기술이 혼합된 건물의 외형에는, 역사적으로 가장 큰 변화의 시기에 일국의 왕이 되어야 했던 삶이 투영된 것만 같다. 덕수궁은 광해군에 의해 경운궁이라는 정식 궁호를 받았고 대한제국의 출범과 함께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으나, 고종이 물러남과 동시에 일제에 의해 일대에 매각되기 이르렀다. 흥과 망을 같이 한 셈이다.


 정동길에는 정체절명의 순간에 도망치듯 궁을 떠나야 했던 고종의 모습이 투영된다. 그는 이 길로 러시아 공관을 향해 피신했다. 타국의 공간에 몸을 맡겨야 했던 왕과 그런 왕을 무기력하게 바라보아야 했던 시대의 범인(凡人)들을 생각한다. 그들이 느꼈을 치욕을 글로 설명할 방도가 없다. 그저 ‘살아 있는 것’에만 의미를 둘 수 있었던 삶이었을 것이다. 그런 삶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의 삶과 생을 향한 투쟁은 ‘독립을 일궈낸 역사’라는 결과물로서 위로를 받는다. 애처로운 과정은 결과로써 위로받는다. 그들이 남긴 생의 진리, 시대의 날줄은 그러한 삶의 분노로부터 시작된다. 불의에 분노하지 않고 순응하는 삶은 나약하다. 분노했던 삶들이 꺼지면서 또 다른 삶으로 이어진 것, 결국 그것이 이 나라의 역사이자 끈질긴 운명이었던 것이다.


백범공원, 서대문 독립공원

 김구 선생과 안중근 의사를 포함한 선열들을 만난 곳이다. 여기서 ‘누군가의 존재 위의 누군가’라는 말을 떠올렸다. 나로서는 도저히 쉽게 다가설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격동하는 시대 앞에 선 그들이 마주한 세상은 절망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 절망 속에서 한 발을 내딛는다는 것이 무서웠을 것이다. 한 치 앞을 모르는 삶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의지를 어찌 구할 수 있었을까.


 감히 알 수 없는 나는 다만 나는 그들을 내 삶의 곁에 두고자 한다. 내가 그들이 증인이 되어 그들에게 존재를 빚진 내 삶의 의무를 다하고자 한다. 그들을 기억하고, 그들이 목숨을 걸어 후대에 남긴 온전한 자유를 누리는 것이 나의 의무이다. 그들을 존중하기에, 그들이 남긴 내 삶을 존중할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희생에 대해 답하는 내 삶과 나의 시대가 될 것이다.


한양 도성, 남산 옛길

 성벽으로 이어진 길들을 걷는 것은 구도적인 여정이었다. 나는 지나간 시대를 향해 걸어감과 동시에 현재 내가 마주한 시대의 공기를 함께 느꼈다. 눈을 돌아 바라본 서울의 전경은 아름다웠고 옛길에 펼쳐진 오르막길은 비장함을 더했다. 나란히 펼쳐진 도로 넘어 우뚝 서있는 빌딩들로부터는 견고함을, 좁은 구획 안에 서로를 의탁하며 서 있는 판자촌으로부터는 아슬한 균형을 보았다.


 성벽과 옛길은 역사의 균열을 잇는 다리와 같이 느껴졌다. 이미 무수한 역사의 실패와 회복을 겪은 역사의 상처가 성벽 곳곳에 배어있었기 때문이다. 묵언의 시대를 넘어 이제는 모두가 말할 수 있고 아픔을 표현할 수 있는 시대에 이르렀다. 그런 시대 속 우리는 어떤 가치를 추구함이 옳을까 생각해본다. 그러나 자유는, 이러한 죽음의 결과물이다. 이를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공생’을 말하고 싶다. 해원은 남한산성에 올라 무수한 삶의 흔적으로부터 위로를 느꼈다. 그러니 그것이 어떠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해도 스러져 간 삶의 공허함이 모두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힘겹게 성장 궤도에 오른 나라는 많은 희생을 딛고 일어섰다. 남한산성과 경복궁에 동원된 선조들의 노동과 삶, 그리고 그 이후에는 서독에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가 있었다. 그렇게 ‘흉하면서 아름다운 나라’가 탄생했다. 


 요컨대 내가 말하는 공생이란, 타인의 희생을 발전의 담론에 투입시키지 않는 그런 나라에 사는 것을 뜻한다. 무엇이든 매품이 될 수 있는 시대에 성벽을 옮기는 노동력 역시 매매될 수 있다. 그러나 타인의 삶이 담보로 잡히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학교에 상주하며 청소를 하는 일에 죽음을 곁에 두어야 하며, 그 안타까운 죽음 이후에도 사과를 받지 못하는 오늘의 불행이 재현되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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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텍스트를 넘어서는 것은 언제나 힘들다. 내가 이해한 바가 맞는지, 나의 감상은 다수의 생각과 무관하지 않은지를 고려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내가 보고 느꼈던 것들을 다른 이들도 느끼리라 생각한다. 스러져 갔던 삶을 바라볼 수 있다면, 당신 존재의 근원을 돌아볼 수 있다면 말이다.



- 서울, 서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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