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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Oct 19. 2021

봄이의 4월_2

나는 전사다

“봄이씨 지원동기가 뭐죠?”

나는 입에 칼을 물었다. 몰라서 묻나요? 돈을 벌려고 지원했죠. 눈을 치켜뜨고 되묻고 싶었다. 돈 때문에 도망간 아빠가 싫었고, 돈 없는 엄마가 싫었다. 돈이 없어 수학여행 못가, 살아남은 내가 싫었다. 세상에서 돈이 제일 싫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오로지 돈 생각뿐이다. 숨이 목구멍까지 찬다. 숨이 막힌다. 이 여자는 정말 내가 왜 여기 앉아있는지 모르는 걸까. 돈이 필요하니까, 돈을 벌어야 하니까. 소설 같은 자기소개서를 쓰고, 아사 직전의 아프리카 아이 같은 이력서를 쓴 게 아닌가. 살아오며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착한 척하며 지금 여기에 얌전히 앉아있는 게 아닌가.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나는 끝없는 바다 속으로 침몰하고 있다.      


차창 끝에 신용카드가 매달려 있었다. 얼마 주유할까요? 물었다. 차창은 내려가지 않았다. 귀를 차창에 댔다. 얼마요? 차창이 1미리미터쯤 내려가며 카드가 떨어졌다. 사장이 나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나는 카드를 주워 엉덩이에 닦으며 연신 허리를 숙였다. 하얀 치마에 누런 얼룩이 졌다. 차는 계속 화를 냈다. 나는 쩔쩔맸다.

“아이씨, 기름냄새.”

여자 목소리엔 신경질이 가득했다. 반말은 아무렇지 않다. 일상이다. 상한 마음은 세상을 욕하며 바람에 날려버리면 된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빠앙! 빵!

차례를 기다라던 차가 클랙슨을 울렸다. 빨간 손톱이 내 가슴 밑을 콕콕 찔렀다.

“야 너 뭐니? 나 무시해?”

“이봐요. 잘못했다고 사과하는데 너무 심하잖아. 어디서 갑질이야.”

클랙슨을 울린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빨간 손톱이 카드를 낚아채고 차창을 올리고 출발했다. 나는 치마를 끌어내리고 남자에게 손짓했다. 남자는 가득이요, 말하고 카드를 내밀었다. 나는 카드를 잡고 돌아섰다. 카드가 내 손으로 넘어오지 않았다. 남자를 돌아보았다.

“아가씨 유럽영화 좋아해요?”

남자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고개를 숙여 남자를 찬찬히 훑어봤다. 아, 남자가 생각났다. 멋쩍은 미소가 얼굴에 번졌다. 도와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은데, 전에 인사도 없이 그냥 가서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는데 말이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남자가 말했다.

“뽀네트, 오늘은 밥 먼저 먹고 유럽영화 볼까?”

나는 백구처럼 발을 구르며 좋다고 답했다. 꽤 오랜만에 활짝 웃었다는 느낌에 쑥스러웠다.

“봄이, 안 뛰어다녀.”

사장의 호통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주유구를 열고 액수를 확인하고 기름을 넣었다. 카드를 받고 결제를 하고 뛰어갔다. 주유기를 빼고 주유구를 닫고 카드를 건네자 뒷자리 차창이 내려갔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또 무슨 봉변을 당하는 건 아닌지 두근두근했다.   

“언니야, 고맙습니다.”

네댓살 쯤 되어보이는 아이가 배꼽에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아, 네, 꼬마아가씨, 나도 고마워요.”

나도 모르게 허리가 숙여졌다. 고맙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는 게 신기했다. 그리고 새삼 깨달았다. 세상엔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이 있다는 것을. 감동은 저 먼 하늘에 있지 않고 눈앞에 있다는 것도. 아이에게 사탕 하나라도 주고 싶었는데 내 손엔 기름 묻은 면장갑뿐이었다. 아이엄마가 목례를 하고 차창을 올렸다. 아이가 손을 흔들었다. 나도 손을 흔들어주었다.       


남자는 내 퇴근시간에 맞춰 주유소 건너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치맛자락 휘날리며 신난 강아지처럼 혀를 빼물고 뛰어갔다. 나는 떡볶이와 순대가 기똥차게 맛있는 분식집에 가자고 했다. 떡볶이와 순대를 2인분씩 시켰다. 나는 테이블 밑에 손을 숨기고 손톱 밑에 낀 기름때를 틱틱 떼어냈다. 남자는 여백 없는 미소를 지으며 나를 빤히 건너다보았다. 볼이 붉어지고 있는 게 느껴졌다. 남자가 청바지를 선물했다.

“와, 이거 비싼건데.”

나는 청바지를 펼쳐들고 바느질과 지퍼를 꼼꼼히 확인했다. 치마를 입은 채 바지를 두 뼘 올리고 치마를 한 뼘 내렸다. 허물을 벗는 것처럼 바지를 입고 치마를 벗었다.

“아저씨 봤죠, 나 똥꼬치마 입고 일하는 거. 치마 입으면 시급이 두 배가 아닌 1.5배. 바지 입으면 최저시급. 웃기죠? 웃긴 사장, 웃긴 세상. 그래도 난 괜찮아요. 난 강철갑옷 입은 전사거든요.”

나는 호루라기에 쪽 입맞춤했다.

“아저씬 고딩때 수학여행 다녀왔어요? 난 삼십이만원 없어서 수학여행 못 갔어요. 담임쌤이 내준다고 했는데 싫다고 했어요.”

나는 묻지도 않은 말을 천연덕스럽게 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상처, 나는 말하고 끝까지 토해내서 위로받고 싶었다. 남자가 끄덕이며 말했다.

“힘든 일이 있었구나. 사람은 힘들 때도 있고 좋을 때도 있단다. 오르막이 있고 내리막이 있듯이. 봄이 오면 더워지고 가을이 오면 추워지는 것처럼. 뽀네뜨. 이젠 다 잊고 힘내라. 아저씨가 응원해 줄게.”

남자가 어깨를 쓸어주었다. 울컥했다. 진심 같았다. 할머니처럼 말했지만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진정 나를 위로해주는 어른 같았다. 꽁꽁 언 마음이 녹아내렸다. 상상 속에서 꿈꾸던 낭만적 사랑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 내가 밥값을 계산하고 싶었다. 나는 일어나며 말했다.

“느낌적인 느낌인데 아저씨 좋, 은, 사, 람, 같아요.”

나는 좋은 사람을 강조했다.      


나는 가난한 프랑스여자가 아랍난민과 사랑에 빠지는 영화를 골랐다. 내가 영화표를 사려고 했지만 남자는 안 된다고 했다. 예전처럼 맨 뒷자리에 앉았다. 나는 무릎을 쓸어내리고 종아리를 주물렀다. 손바닥을 긁지 않았다. 거칠게 숨을 쉬지도 않았다. 전보다 편안했다. 첫데이트를 하는 소녀처럼 설렜다. 나는 이따금 남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남자가 손을 잡으면 못 이기는 척 가만히 있을 작정이었다. 남자는 내 시선을 모른 척했다. 영화 속 남녀가 길거리에서 한바탕 싸운 후 키스를 했다. 그때 남자가 내 손을 잡았다. 내 손등을 얼굴에 비비고 냄새를 맡았다. 거침이 없었다. 남자 팔꿈치가 가슴에 닿았다. 자연스럽지 않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불편했다. 남자를 내 멋대로 좋은 사람으로 만든, 내가 나를 속인 결과였다. 로맨스가 아니었다. 몸이 굳었다. 기분 나쁜 소름이 돋았다. 말로만 희롱하던 사장이 실제로 나를 추행하는 느낌이었다. 로맨스는 끝났다. 비극이었다. 낭만적 사랑이 나에게 올 리 없었다. 나는 얼어붙었다. 어린아이가 됐다. 바보가 됐다. 호루라기를 불지도 남자를 뿌리치지도 못했다. 내가 주인공인 영화가 비극으로 끝나지 않기를. 나는 현실을 부정했다. 키스가 끝나자 사람들이 브라보를 외치며 박수를 쳤다. 남녀는 답례라도 하듯 손을 흔들었다.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조명이 커졌다. 그때 남자 손을 뿌리쳤다. 내 손을 놓친 남자는 얼굴을 두 손으로 쓸어내렸다. 나는 벌떡 일어나 손바닥을 청바지에 비볐다. 남자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뽀네뜨 외롭지 않니? 아저씬 요즘 너무 외롭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빠르게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외로워요. 아저씨도 저처럼 그냥 열심히 씩씩하게 살아요.”     

남자는 지하철역 앞에 차를 세웠다. 남자 눈빛이 흔들렸다. 남자는 힘이 없었다. 불안해 보였다. 욕심 없는 눈빛이었다. 그렇다고 믿고 싶었다. 로맨스가 우울하게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호루라기를 잡고 남자 가까이 갔다.

“아저씨 불어 봐요. 기분 좋아져요.”

나는 셔츠에 호루라기를 쓱 문질러 닦고 남자 입에 댔다. 뺨이 닿을 듯 가까워졌다. 빨라지는 숨결 속 단내가 남자를 다그쳤을 것이다. 남자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호루라기를 불었다.

휘이.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큭 웃고는 호루라기를 삐익, 불었다.

“힘내요 아저씨.”

나는 허물없는 친구 사이처럼 남자 등을 토닥였다. 나도 누군가를 위로해줄 수 사람이었다. 뭉클했다. 차문을 열고 일어나는 순간 남자가 손목을 잡았다. 삼십 만원을 내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뽀네트. 아저씨 정말 외롭다. 우리 어디 가서 한 번만…….”

나는 말뜻을 이해했지만 모른 척했다.

“아니, 아니, 괜찮아요. 오늘 선물도…….”

남자는 내 손에 다시 돈을 쥐어주려고 했다. 나는 손을 뒤로 숨겼다. 눈에 날이 섰다. 피가 돌지 않는다. 돈을 주려는 마음과 받지 않으려는 마음이 부딪쳤다. 같은 맛 공기를 마시고 다른 맛 공기를 내뱉고 있었다. 밀고 당기는 실랑이가 이어졌다. 남자는 내 손목을 움켜잡고 끌어당겼다. 주먹 쥔 내 손을 강제로 폈다.

“받아!”

“싫어요!”

“어른이 주면 고맙습니다, 하고 받는 거야. 받아!”

“싫어요! 나도 어른이에요.”

“받아! 제발.”

“싫어요! 싫어! 아저씨도 돈도 다 싫어!”

마음먹은 데로 써지지 않는 드라마는 말이 더해질수록 엉켰다. 머릿속이 시멘트처럼 굳었다. 얼굴이  백지처럼 하얘졌다. 남자는 내 어깨를 붙잡고 흔들어댔다. 아저씨 이러는 거 폭력이에요. 말하고 싶은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현실이 아니길, 봄이면 찾아오는 악몽이 아니길 바랐다. 남자가 내 배낭에 돈을 넣으려다 가슴을 밀쳤다.

투득, 툭.

셔츠 단추 두 개가 떨어졌다. 배낭에서 노란리본이 끊어졌다. 브래지어와 속살이 눈에 걸렸다. 내 눈에 흙물이 고였다. 진공상태 같은 침묵 속에서 겁먹은 숨소리가 빨라졌다. 갑자기 남자가 핸들을 내리쳤다.

“한 번에 삼십이면 됐지. 너 나 돈 때문에 만난 거잖아. 돈이 왜 싫어? 돈 없음 죽는 세상이야. 돈 싫어하는 사람 세상에 아무도 없어.”

눈동자에 붉은 빗금이 그어졌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셔츠를 부여잡고 울먹였다. 아래눈꺼풀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악을 쓰며 소리쳐 울지 못하고 흐느끼기만 하는 내가 더없이 불쌍했다. 남자가 내 어깨를 잡았다.

“뽀네뜨 이러지 말고. 한 번만.”

나는 남자 손을 쳐냈다.

“개씨끼! 아저씨도 개새끼야! 나 돈으론 가난해도 맘은 가난하지 않아. 난 돈한테 안 져. 내가 불쌍해? 엄마 병원비도 내가 내고, 동생 용돈도 내가 주고, 빼꾸 간식도 내가 사주는데. 내가 왜 불쌍해? 나 약하지 않아. 난 전사라고! 아저씬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저씨도 나쁜 어른이야! 돈 안 줘도 된다는데 왜? 오늘 데이트한 거 아냐. 돈을 왜 주냐고? 내가 조건 뛰는 애야. 내가 그런 년이냐고? 똥꼬치마 입고 일하는 게 얼마나 싫은 줄 알아? 수학여행비 대신 내준다는 담임쌤, 착한 척 도와주는 척하면서 넌 집에 삼십만원도 없니? 속으론 날 비웃었어. 그 돈 받으면 자존심 상해 죽을 것 같았어. 수학여행 못 간 게 얼마나 후회되는지 알아? 그때 나도 친구들이랑 죽고 싶었어. 보상금 받아서 엄마랑 동생이라도 편히 살게. 그 비참했던 기억, 돈 때문에 가슴이 찢어지는 일, 그런 일 다시 생길까봐 얼마나 무서운 줄 알아? 내 친구들, 돈에 미친 어른들이, 돈 때문에 죽인 거야. 아저씨도 똑같애. 돈 주면 내가 좋아서 팬티 벗고 가랑이라도 벌릴 줄 알았어! 아저씨도 돈이면 다 된다고 생각하는 쓰레기야. 돈으로 갑질하는 게 젤루 찌질한 거야, 알아? 올봄엔 별일 없이 넘어가나 했는데, 아저씨가 다 망쳤어! 알아?”

삐익. 삐익. 삐이익. 삐이이익. 삐이이이이익…….

나는 지칠 때까지 호루라기를 불었다. 벤치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수많은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별들이 봄아 안녕, 잘 지내지? 안부를 물었다. 고마워, 그리운 나의 친구들. 난 잘 지내. 나는 별들에게 인사했다. 별들이 내 어깨에 내려앉았다.      


사장이 월급봉투를 흔들며 고갯짓했다. 나는 못나게 웃으며 다가갔다. 사장이 월급봉투를 내밀었다. 나는 봉투를 잡았다. 사장이 내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우리 막내 엉덩이 죽인다.”

나는 속으로 전의를 다졌다.

죽고 싶지? 손만 대봐. 죽여버릴테니깐.

나는 끌려가지 않으려 버텼다.

“가만히 있어.”

선뜩한 목소리에 못난 미소가 일순 일그러졌다. 가만히 있지 못해. 무섭지 않아. 나는 거리를 가늠했다. 발을 뻗을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무릎으로 찰 수밖에 없는 거리다. 사장이 더 가까이 끌어당긴다. 호루라기를 불고 싶다. 손을 움직일 수 없다. 턱을 당기고 입술을 오물거린다. 입에 물리지 않는다. 눈가가 떨리고 이내 젖어든다. 나는 울먹인다. 곧 울음이 터질 것 같다. 그때다. 경찰차 싸이렌이 들리고, 지이잉 기계음을 내며 자동문이 열렸다. 사장이 다급히 내 손을 놓았다. 나는 월급봉투를 움켜쥐고 큰 소리로 말했다.

“사장님 고맙습니다. 퇴근할게요.”

속으론 개새끼, 어른이면 어른답게 살아, 욕을 퍼부었다. 나는 핏기 없는 팔을 주무르며 화장실에 갔다. 못난 미소는 마스크팩 떼어 내듯 벗겨 거울에 포스트잇처럼 붙였다. 거울 속 나는 몹시 지쳐 보였다. 나는 옷을 갈아입으며 나를 위해 노래 불렀다.

월급봉투 타고 맛난 봄 사러 가야지. 제일 비싼 딸길 한가득 사서 엄마 병원에 가고, 동생 학원비도 주고, 빼꾸에겐 한우선물세트 사줘야지. 나도 백화점 가서 예쁜 옷 사 입을까. 지겨운 봄도 끝나가잖아. 난 울지 않아. 엄살 부릴 시간 없어. 난 약하지 않아. 난 전사야. 내년에 또 봄이 오면 나도 제일 비싼 마스크 쓰고 봄꽃여행 가야지. 흑, 아아아아.

물을 틀어놓고 눈물을 삼켰다. 판다 같은 눈가를 닦고 다시 눈화장을 했다. 나는 춤추듯 치맛자락 휘날리며 걸어갔다. 눈물겹게 청명한 봄날이었다.


누구라도 좋았다. 끝까지 눈물을 쏟을 때까지 끌어안고 울고 싶었다. 백구에게 줄 간식을 사서 공원을 찾았다. 백구는 할머니와 뛰어 놀고 있었다. 할머니가 돌보는 길고양이 네 마리는 빵굽는 자세로 밥을 먹고 있었다. 화목한 가족을 보는 듯했다. 컹, 컹, 백구가 같이 놀자 짖었다. 할머니가 다정하게 손짓했다. 할머니 백발머리가 오늘따라 더 멋있게 보였다. 할머니는 내 마음이 어떤지 다 알고 있으니, 자기를 끌어안고 펑펑 울어도 된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나는 아아아아, 아이처럼 울면서 달려갔다. 할머니에게 안겨도 좋고 백구에게 안겨도 좋았다.      

          



“나이가 어린데, 청소일 할 수 있겠어요?”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요?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목소리가 컸다. 곧 후회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다. 나는 손바닥을 긁으며 고개를 숙였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봐요.”

하고 싶다. 간절히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듯 꼭 합격하고 싶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한 마디라도 더 한다면 눈물을 쏟고 주저앉을지도 모른다. 손바닥을 긁으며 고개를 든다. 여자와 눈이 마주친다. 조금은 맑아진 4월의 눈빛이다. 여자는 거짓과 거짓이 만나 거짓이 되고 진실과 진실이 만나도 거짓이 되는, 아파도 아프다고 슬퍼도 슬프다고 쓰지 못한 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에 몇 점을 주었을까. 여자는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아니다. 나를 면접 보고 평가하는 사람일 뿐이다. 나는 말없이 여자의 눈이 맑아진 이유를 찾는다.

“네. 수고했어요. 가보세요.”

나는 천천히 일어나 목례하고 돌아선다. 여자는 내가 쓴 거짓에서 진실을 발견했을까. 어른의 몸이지만 아직 아이 같은 나를 이해했을까. 어쩌면 다른 사람들처럼 내 뒷모습을 보며 비웃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상관없다. 모두와 친구가 될 수는 없으니까. 어쨌든 나는 흰 바다에 홀로 떠있는 검은 섬에서 살아남았다. 오늘밤 목적 없는 길을 헤매다 별들이 어깨를 두드려도 울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힘들 때마다 잊지 않고 찾아와주는 친구들을 안아줘야겠다.

“잠깐만요. 봄이씨 합격하면 오래 다닐 건가요?”

휘청, 스텝이 꼬인다. 비틀거리지 않는다. 여기서 넘어질 수 없다. 눈물이 고인다. 나는 입술을 깨문다. 목소리에 리듬이 실리지 않기를.

“네.”

나는 돌아서지 않는다. 표정을 보이기 싫다. 전사가 눈물을 흘리는,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나는 전사처럼 힘찬 걸음으로 면접장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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