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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Oct 19. 2021

안녕하세요_1

누군가 앞에 서면 문이 열린다


1

망했다.

모르는 사람에게 인사했다고 경찰에 쫓기는 스토커가 됐다. 고개 숙이며 안녕하세요, 인사하는 게 나빠요? 죄예요? 경찰까지 출동할 일인가요? 처음 만나는 사람끼리 서로 이름을 주고받으며 자기를 소개하는 일, 만나거나 헤어질 때 예를 갖추는 일, 사람들 사이에서 지켜야 할 예의로 간주되는 게, 인사 아닌가요? 인사만 잘해도 굶어죽지 않는다는 옛말이 기억나는데, 도서관에 있는 어떤 여자가, 내가 인사했다고 112에 신고를 했다. 끝 모를 상상력의 소유자. 후, 아, 유? 도대체 당신은 누구십니까?      

제주에 내려왔을 때,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전재산이라 말하기엔 낯부끄러운 백여만 원의 돈은 누군가의 하룻밤 유흥비. 천 권도 팔리지 않은 시집 두 권의 지적재산권은 가스 없는 라이터. 한 시간만 걸어도 곰 한 마리의 무게로 어깨를 짓누르는 배낭. 맞댄 등과 떨어지면 배낭을 욕하고 헤어지자 소리쳤다. 돈과 시집은 버려도 배낭을 버릴 수는 없었다. 내 모든 역사가 기록된 배낭을 던져버리는 건 집을 불태우는 것과 같았다. 나는 무모해질 수밖에 없었다. 무료로 지낼 수 있는 빈집을 구하기 위해, 무작정 발품을 팔았다. 촌집이 듬성듬성 모여 있는 시골마을 돌담길을 걷고 또 걸었다. 외딴마을에서 사람들을 만나기란 하늘에서 별 따기였다. 밭일하는 어르신에게 뜬금없이 빈집 있어요? 물어볼 수도 없었다. 불타는 발바닥에 주저앉고 싶을 때, 교복을 입은 한 여학생이 고개를 숙이며 안녕하세요, 인사했다. 가슴이 찡했다. 짜릿한 감동이었다. 어른대접을 받은 것 같아 뭉클했다. 나도 고개 숙여 고마워요, 인사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나처럼 보잘것없는 놈에게 어른이랍시고 먼저 인사해주는 순박한 학생이 있고, 넓은 마당에 방 3개짜리 집을 살고 싶을 때까지 그냥 살아, 무료로 빌려주는 인심 좋은 바닷가 시골마을 도서관에서 인사한 게, 경찰에 신고할 일이냔 말입니다.      

종이 위 글자에 소금이 뿌려진다. 검은 실지렁이가 미친 듯이 몸부림친다. 뒤엉킨 실지렁이는 파도에 휩쓸렸다. 누런 침 얼룩만 남은 종이, 초점이 흐려진다. 멀미다. 속이 뒤집어진다. 내가 상철씨처럼 키 크고 잘생기지 못해서, 커피색 피부에 눈동자만 빤짝거리는 동남아 남자 같다고 인종차별 하는 건 아닐 테고, 뭐냐고 정말! 어이가 없다. 행복포인트 적립이 이렇게 힘들 줄이야 미처 몰랐다. 도서관에서 책 속 이상형을 만나 연애를 하다가, 진도가 나가지 않으면 바다에 시선을 던지고, 결코 흔들리지 않는 수평선을 배우는 게 일상인 나. 오늘 나는 진짜, 망했다.      


2

해무가 마당까지 넘어왔다. 1미터 앞도 보이지 않는다. 바람이 없다. 나는 옷을 다 벗고 해무 속으로 들어가 갇힌다. 부끄럽지 않다. 손을 뻗어 검은 해무를 만져본다. 행복처럼 잡히지 않는다. 관념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빛이 어둠을 몰아내지 않아도 좋다. 두렵지 않다. 우주에 고립된 미아가 된다. 외롭지 않다. 나는 자유다. 지금 나는 누구보다 자유롭다.      

오늘도 고사리를 꺾고, 통발을 던지고, 도서관에 왔다. 먼저 해리에게 안부를 묻고, 2층 열람실 자동문이 열리면 나도 자동이다. 사서에게 고개를 숙이고, 입모양으로 안녕하세요, 인사한다. 내가 늘 앉는 자리가 비어 있다. 기분이 좋아진다. 의자에 배낭을 올려놓고 책장 숲을 헤치며 이상형을 찾는다. 다리는 슬로푸드, 눈동자는 패스트푸드다. 오늘따라 사랑스런 그녀가 눈에 박히지 않았다. 뒤통수에 달라붙는 시선이 못내 신경 쓰였다. 경찰 두 명이 사냥감을 쫓는 포수처럼 따라다녔다. 나는 개의치 않는다. 법 없이도 살아온 나다. 드디어 찾았다. 오늘 나는 독일로 간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책 읽어주는 남자’를 선택했다. 열다섯 살 소년과 서른여섯 살 여인의 파격적인 사랑이야기에 빠져 희노애락을 만끽할 것이다. 수평선과 창틀 높이를 맞추면 딱 내 눈높이다. 수평선이 신경질을 부린다. 울렁출렁 점프를 한다. 늘 앉던 자리에 앉으면 보호막이 처지고 삼매에 빠져야하는데, 마음이 요동친다. 심호흡을 하고, 기지개를 켜고, 턱을 들어올린다. 하나, 둘, 고개를 휙 돌렸다. 눈동자가 정면으로 충돌했다. 경찰이 날쌔게 시선을 피했다. 나는 경찰의 수상한 움직임을 주시했다. 경찰은 책을 거꾸로 들고 책장을 빠르게 넘겼다. 나는 눈을 감고 지나온 내 역사를 수사하듯 꼼꼼히 되짚었다. 사회의 질서를 깨거나, 누군가를 헤하거나, 뭔가를 훔치거나, 없다. 기억도 없고 악플도 없다. 앞으로 살아갈 미래를 상상해본다. 깜깜하다. 그녀가 그에게 책을 읽어달라 손을 내미는 달콤한 장면인데, 법 없이도 사는 나에게 경찰이 왜? 누명이다. 억울하다. 경찰에게 따져야겠다. 왜 선량한 청빈시인을 괴롭히냐고. 눈을 뜨고 일어나 휙 돌아섰다. 경찰이 없다. 열한시 방향 엄마와 아이, 세시방향 데이트중인 커플, 안내데스크에서 졸고 있는 사서 여자. 저격수의 눈으로, 크레인에 현미경을 달고 사방을 톺아보았다. 제복 입은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나의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조사한 경찰이 ‘혐의 없음’ 결론을 내리고 돌아갔나. 자리에 앉아 일렁이는 수평선에 다림질을 했다. 다시 리셋하고, 나는 그녀에게 책을 읽어주는 그가 된다. 그녀와 그가 함께 목욕을 하고, 내 가슴도 두근거리는데, 그런데 또 뒤통수가 따끔따끔하다. 하나, 둘, 고개를 휙 돌렸다. 경찰과 시선이 딱 맞부딪쳤다. 이번엔 경찰이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나는 책상을 탁 내리치고 경찰에게 달려갔다. 100미터달리기를 하듯 뛴 것은 아니다. 얼음판을 지치 듯 스스슥, 스슥 빠른 걸음으로 갔다.

“왜요?”

목소리가 컸다. 종이의 날갯짓이 멈추고 열 두 개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사서도 미어캣처럼 고개를 치켜들고 놀란 사슴 눈으로 쏘아보았다. 안녕, 인사해도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는 여자가 웬일. 경찰 둘은 서로 눈짓, 턱짓하며 대답을 미뤘다. 나는 한 발짝 다가가 빨리 답을 하라 채근했다.

“뭐요? 내가 뭐 잘못했어요?”

늙은 경찰이 껴안으려는 포즈를 취하며 내 어깨를 감쌌다. 찌든 담배냄새 머금은 입이 귀에 닿았다. 간접흡연 테러에 성추행이다. 콧잔등에 너울이 친다. 일단 참자. 경찰은 38구경권총에 삼단봉에 테이져건에 수갑까지 찼다. 늙은 경찰이 조심스레 말을 흐렸다.

“스토커 신고가 들어와서…….”

“네? 내가요? 내가 누굴 스토킹 했는데요?”

나는 소리치고 말았다. 책들이 날개를 펴고 날아올랐다. 나는 사서를 건너다보았다. 사서가 도서관에 불량배가 나타났다고 112에 신고를 할지도 몰랐다. 사서는 자리에 없었다. 젊은 경찰이 신고내용을 조리 있게 설명했다. 이해되거나 설득되는 내용은 아니었다. 혼자 제주에 내려와 사는 여자는, 모르는 내가 인사를 했다고, 무서워 죽겠다고, 112에 신고를 했다. 경찰은 신고를 받으면 5분 내에 무조건 출동해야 한다고 했다. 우와, 언제부터 경찰이 이렇게 직업의식이 투철했나 몰라. 불타오르네, 사명감. 나는 팔짱을 끼고 어처구니를 찾았다. 찾지 못했다. 경찰들도 머리를 긁적이며 어처구니를 찾았지만 찾지 못했다. 나는 나직이 물었다.

“인사한 게 스토킹인가요? 네?”

늙은 경찰도 젊은 경찰도 답하지 못했다. 누가 신고했는지 물어봤지만 알려주지 않았다. 늙은 경찰이 능글맞게 등을 쓰다듬고 돌아섰다. 성추행으로 112에 신고하면, 이 늙은 경찰이 출동하겠지. 아, 계속 참자.      


3

새 책보다 낡은 책이 좋다. 잉크냄새보다 곰삭은 세월냄새가 좋다. 새로운 이야기보다 오래된 이야기가 더 좋다. 먼지이불 고이 덮고 자던 책을 살살 어루만진다. 간혹 옛이야기 속 밑줄 그어진 한 줄의 고백이 좋다. 이 문장 너무 사랑스러워. 훔치고 싶어. 도서관에 오면, 나는 보호받았다. 이따금 마음이 통하는 누군가를 만나면 기쁨이 더할 나위 없었다.      

한 달에 십만 원도 못 버는 실업작가는 잉여인간일 뿐이다. 가난하기에 무용(無用)한 나는, 주눅 들고 약해지고 초라해졌다. 나는 생각할 능력을 잃었고 방어할 힘이 없었다. 도시에선 나 하나 간수하기에도 벅찼다. 극에 다다른 생활고에 숨이 막혔다. 윤택한 생활은 없고 연명하는 생존만 남았다. 내 역사가 모래성처럼 허물어지고 있었다. 그들의 책은 나를 비웃었고, 내 책은 나를 멸시했다.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나요? 그렇다 말해야 맞는데 그렇다 말하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스승의 가르침에, 나는 침을 뱉었다. 그들의 책을 찢고, 내 책을 불태워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끼니를 챙겨먹는 날이 드물었다. 무능자처하지만 원통했다. 나만 불행하다는 자기연민은 나를 보호해주지 못했다. 스스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늪에 빠져, 살려 달라 비명을 질렀다. 불운일까, 불행해지려는 걸까. 행복이 습관이듯 불행도 습관이다.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죽어도 좋다는 용기가 절실했다. 못난 생각은 다이아몬드가 됐다. 공원에서 아이와 뛰어오는 내 또래의 남자를 본다. 행복해 보인다. 나도 행복해질 수 있을까. 행복은 관념이다. 관념은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다. 관념은 똥이다. 몸 속 똥은 괜찮고 몸 밖 똥은 더러운가? 행복도 똥이고 똥도 똥이다. 행복은 가짜다. 구체적이어서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어야 진짜다. 불행이라는 똥에 치를 떨며 행복이라는 똥을 찾아 헤매지 않으리라. 어느 누구도 나를 보호해주지 않는다. 내가 나를 보호해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살기 위해, 죽지 않기 위해 걸었다. 지치면 멈춰서 욕하며 쉬어도 좋았다. 막다른 끝에 다다르면 어떤 선택이든 할 수 있으리라. 길을 잃었다. 헤매다 부딪치고 깨졌다. 막다른 골목까지 왔다. 돌아서도 돌아갈 수 없는 끝이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원하지 않았는데 문이 열렸다. 자동문이었다. 누군가 앞에 서면 자동문은 열린다. 그 문에 차별은 없다. 누군가를 가리지 않고 스르륵 열린다. 행복의 문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를 가리지 않는다. 문 앞에 서면 반드시 열린다. 나는 도망자다. 나는 나를 버리고 줄행랑쳤다. 나는 땅끝까지 걸어갔다. 수평선은 흔들리지 않았다.      

멀미를 견디며 바다를 건넜다. 도시를 떠나자 숨통이 트였다. 행운이 왔다. 행운은 찾아온 게 아니었다. 내가 찾아낸 것이었다. 눈을 뜨면 바로 눈앞에 있고, 눈을 감아도 바다가 보이는 마을로 이사 온 건 행운이었다. 오전엔 잔잔한 바다, 오후엔 거친 바다, 시시각각 다른 모양과 색으로 변하는 바다. 이해할 수 없는 추상화여도 좋았다. 바다는 날마다 나를 홀렸다. 나는 아! 감탄사를 찍고 생각했다. 내 것이 아닌 바다여서 다행이라고. 내 것이 아니기에 그들처럼 욕심낼 일 없어 좋다고. 사는 게 비루해지면 바다에 나가 바람을 붙잡고 땅을 박차면 그만이다. 중력은 사라지고 깃털같이 둥실, 떠오를 테니깐. 바다를 보는 건 무조건 좋았다. 제일 좋은 건 창 너머 와이드스크린풀HD바다가 보이는 도서관이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도시에서의 과거는 잊고, 새로 미래를 쓰기 좋은 한적한 바닷가마을에서, 이상형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도서관은 연애 중이었다.      


4

해가 뜨기 전, 나는 들에 나가 고사리를 꺾었다. 오월 제주엔 밤새 이슬을 맞고 자란 고사리가 쑥쑥 올라왔다. 무덤 근처 평지 고사리는 할머니들의 몫이었다. 나는 돌밭을 지나 언덕을 올랐다. 처음엔 잘 보이지 않던 고사리가 이젠 잘 보였다. 정신없이 고사리를 찾다, 이따금 발에 밟히는 뱀은 오싹했다. 서너 시간 고사리를 꺾다보면, 어느새 볕은 뜨거워지고 몸은 땀으로 흥건했다. 고사리를 삶아 평상에 널어놓고, 미역놀이를 했다. 햇볕과 해풍에 젖은 몸을 맡기면 금방 뽀송뽀송해졌다. 잘 말린 고사리는 1킬로그램에 5만원이다. 일주일 살기에 충분한 돈이다. 낮잠을 한숨 자고 도서관에 갈 것이다. 알람을 맞출 필요는 없다. 한 시간 후면 어김없이 뎅, 뎅, 종이 울었다. 동박새 짝짓기소리와 어우러진 종소리를 들으며 깨어나면, 피로는 가뭇없이 사라졌다.     

통발에 벵에돔 두 마리가 뻘떡이고 있다. 3짜 벵에돔 한 마리를 꺼내 비닐봉지에 담는다. 4짜 벵에돔은 내 저녁반찬이다. 빈 통발에 미끼를 넣는다. 이틀 만에 썩은 내장은 지독한 냄새를 풍긴다.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나는 통발을 던지며 용왕님께 빌었다. 바닷물에 손을 씻고 검지를 코끝에 댄다. 미간에 흉터가 눌러앉기 전에 벅벅 문질러 펴고 다시 손을 박박 씻는다. 나는 뒷짐을 지고 유유자적 걷는 선비가 된다. 느린 걸음에 걱정이 따라올 리 없고, 무엇보다 목적지가 있어서 좋았다. 30분쯤 걸어 도서관에 왔다. 이제부터 바쁘다. 제일 먼저 도서관 마스코트 해리공주 밥자리에 벵에돔과 삼다수를 진상한다. 먼저 눈길 피한 적 없는 도도한 그녀, 손 내밀면 멀어지고 등 돌리면 다가오는 밀당의 고수다. 우리는 곧 사랑에 풍덩 빠져 죽고 못사는 사이가 되겠지. 해리야, 일단 썸부터 타자. 처음 도서관을 왔을 때, 해리는 야옹, 나랑 연애할래요? 말을 걸어주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해리는 나한테만 작업멘트를 날린 건 아니었다. 해리는 마주치는 사람들 모두에게 눈을 맞춰주고 말을 걸었다. 해리는 사람을 좋아했다. 물론 2미터 이상 적당한 거리두기는 잊지 않았다. 사람 사는 이야기를 찾아 도서관에 온 사람들은, 먼저 말을 걸어주는 해리의 애교에 녹아내렸다. 대부분 해리를 좋아했지만 간혹 돌을 던지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해리에게 밥과 물을 챙겨주기 위해, 번호표를 뽑아들고 줄을 섰다. 나는 자연산 활어만 진상했다. 해리는 집이 없었다. 공주에게 집이 없다니 나라의 수치다. 안타깝지만 당장 어쩔 도리가 없다. 도서관 관장이, 똥내 지린내 아주 민원이 장난 아닙니다, 밥자리 빼세요. 하면 큰일이다. 고통 받는 모든 존재가 보호받는 날이 어서 빨리 오기를.      

2층 열람실 문이 열린다. 사서는 자리에 없고, 늘 앉던 자리는 비어 있다. 기분이 좋아진다. 책장 숲 사이를 산책하듯 거닐다, 상철씨와 마주치면 기분이 더 좋아질 것이다. 상철씨는 복지관 출신 도서관 직원이다. 180센티미터 넘는 키에 뽀얀 얼굴, 남자인 내가 봐도 반할만큼 매력이 넘쳤다. 방탄소년단의 여덟 번째 멤버로 영입돼도 손색이 없었다. 아무튼 아이돌처럼 잘생긴 청년이었다. 아쉬운 점은, 몸은 21살인데 마음은 7살이었다. 어느 날 책장 숲 속에서 연애상대를 고르는 중이었다. 아프리카를 지나 유럽으로 가는 길을 돌았을 때, 쪼그려 앉아 책에 쌓인 먼지를 닦고 있는 상철씨와 마주쳤다. 면장갑을 거꾸로 껐는지 손등이 빨갰다. 상철씨는 벌떡 일어나 꾸벅 인사했다. 편히 지나가라는 듯 책장에 등을 바싹 붙였다. 나는 멀뚱히 서있었다. 이토록 공손하게 인사하는 도서관 직원이 있었나. 그것도 먼저. 기억에 없다. 처음이었다. 한국인의 특성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눈이라도 스치면 인상부터 쓰는 게 국룰 아니던가. 머리를 짧게 한 번 털고 쓸데없는 생각을 멈췄다. 이름표를 보고 나도 고개를 숙여 입모양으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수고하세요. 상철씨가 고갯짓과 입모양으로 말했다. 인사, 행복포인트. 나는 끄덕였다. 사람과 마주치면 먼저 인사하는 게 행복포인트라는 뜻이겠지. 상철씨 장갑 거꾸로 했어요. 나는 장갑을 벗고 다시 끼라는 시늉을 했다. 상철씨는 붉게 코팅된 손등을 꼬집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보물을 다루듯 책을 어루만졌다. 오늘은 내가 먼저 인사하고 행복포인트를 적립해야겠다. 그녀를 찾다가 길을 잃고, 상철씨를 찾다가 또 길을 잃는다. 우두커니 서서 바다를 본다. 입꼬리가 자연스레 올라간다. 여기선 길을 잃어도 괜찮다. 책장 숲속에선 길을 잃어도 두렵지 않다.

“안 그쳐. 버리고 간다.”

퍽. 아이고, 아프겠다. 등짝을 맞은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아이엄마가 등진 책장에 오늘 내가 선택한 그녀가 있었다. 우는 아이를 더 큰 목소리로 다그치는 엄마는 그녀를 감금한 채 물러나지 않았다. 그녀는 애절한 눈빛으로 구조를 바라고 있었다. 구출작전은 이이제이다.

“우리 왕자님 못된 아줌마한테 혼났어요. 아저씨가 착한 엄마 찾아줄게요.”

나는 무릎을 꿇고 팔을 벌렸다. 아이는 구세주를 만난 듯 와락 안겼다. 아이는 오른팔로 내 목을 끌어안고, 왼팔로 삿대질을 했다. 손가락 끝은 엄마를 향하고 있었다. 엄마는 눈앞에서 납치라도 당한 듯 당황했다. 아이는 울음을 그쳤다. 지쳤는지 몸이 늘어졌다. 나는 엄마에게 아이를 넘겨주었다. 엄마는 입속에서 말을 씹었다. 다행히 뱉지는 않았다. 엄마는 잠든 아이를 안고 돌아섰다. 구출작전은 단박에 성공했다. 나는 그녀를 책장에서 꺼냈다. 툭. 곧 사랑에 빠질 그녀를 떨어뜨렸다. 나는 사랑스런 그녀를 지키지 못했다. 누군가 내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인상이 구겨진다. 기분에 노란불이 들어온다. 아니다, 이럴 때 행복포인트를 적립해야 더블이다. 돌아서서 안녕하세요, 인사를 해볼까. 하나, 둘, 인상이 펴지지 않는다. 아직 수양이 부족하다. 나는 눈에 팍 힘주며 휙 뒤돌아섰다. 아무도 없다.     

그녀는 내 프러포즈를 받아주지 않았다. 지리멸렬하다. 모두에게 휴식이 필요한 시간이다. 그녀를 고이 덮어두고 커피를 마시러 나왔다. 스타벅스보다 열량 높은, 한 끼 식사로 충분한 이백 원짜리 자판기커피다. 해리공주님은 식사를 하셨나. 헉. 넌 누구냐? 웬 사람이 고양이사료를 먹고 있었다.  

“누구세요?”

상철씨였다. 뒷걸음으로 기어 나와 고개를 숙였다. 장갑 낀 손바닥이 빨갰다. 책 먼지를 닦을 때 왜 장갑을 거꾸로 하는지 알았다. 신간 책날에 베인 후부터 상철씨는 장갑을 꼈을 것이고, 코팅된 면으로 책 먼지를 닦으면 불편했을 것이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손등을 빨갛게 물들이고 책을 돌보는, 일곱 살처럼 순수한 스물한 살. 상철씨는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고 바지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나보다 키 크고 잘 생긴, 무엇보다 매달 월급도 받는 치명적인 라이벌이 등장했다. 상철씨도 해리공주와 밀당 중이었다. 상철씨는 손목을 비틀어 애플워치를 깨워 시간을 보여주고 뛰었다. 멋진 미소와 예의바른 인사를 빼먹지 않았다. 숲에 책을 심고 가꾸느라 바쁜 상철씨는 고양이 밥자리까지 청소해주고 있었다. 오늘도 상철씨는 나보다 많은 행복포인트를 적립했을 것이다. 오늘은 졌다. 흔쾌히 패배를 인정할 줄 아는 나는 쿨가이. 졌는데 왜 기분이 좋아지는지 모르겠다. 해리공주 안녕, 우리 내일 또 만나요.      


5

상철씨처럼 나도 행복포인트 적립을 시작했다. 도서관에 오면 마주치는 사람마다 인사를 했다. 각박한 세상을 아름답게 바꿀 사회운동을 실천하겠다, 뭐 그런 거창한 이유는 아니다. 입꼬리 올리고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게, 뭐가 어렵냔 말이다. 하루 이용객 많아야 이십 명도 안 되는 바닷가 촌구석 도서관에서. 숨만 쉬어도 돈이 든다는 요즘, 인사는 돈도 들지 않는다. 내가 이상한다고. 모르는 사람에게 왜 인사하냐고. 처음부터 아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해리가 앞발을 돌려가며 그루밍하고 있다. 나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안녕, 인사를 건넨다. 손을 흔들면 시큰둥하고 헤, 웃으면 하품을 한다. 도전이다. 나는 이빨이 보이지 않을 만큼 미소 지으며 슬며시 다가간다. 윽. 해리 눈동자에 칼이 새겨진다. 정지, 정지. 뒤로, 뒤로. 스텝이 꼬인다. 하악. 해리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다가오면 죽는다, 하악질을 한다. 이내 다리를 앞뒤로 스트레칭하고 꼬리를 세웠다 폴짝 날아오른다. 조금 얄밉고 많이 서운하지만 기다려야 한다. 빨리 뜨거워진 사랑은 빨리 식기 마련이니깐. 나는 밥자리를 청소해주고 물을 갈아준다. 흙 묻은 옷자락을 털고 도서관에 들어간다. 2층 열람실 문이 열린다. 내 눈동자는 자동으로 안내데스크에 앉아있는 사서를 향한다. 시선이 만났다. 찬스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입모양으로 안녕하세요, 인사했다. 윽. 그녀 눈동자에 칼이 새겨진다. 해리와 똑같은 반응이다. 조금 섭섭하고 많이 무섭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인사를 해도 행복포인트가 적립되는 걸까. 상철씨한테 물어보면 답을 알려줄까. 한 달 넘도록 그녀에게 인사하고 있지만 그녀는 매몰차게 내 인사를 거부했다. 그녀는 왼손으로 볼펜을 꽉 쥐고, 종이가 찢어질 정도로 분노하는 보름달을 그렸다. 왜 내 인사 안 받아요? 남자답게 물어볼까. 아니다. 인사하는 것도 자유고, 받지 않는 것도 자유다. 나는 목표를 잃은 시선을 달래고 책장 숲속으로 숨어들었다. 못 봤다. 못 본 거다. 못 봤으니 인사를 받을 수 없는 거다. 때로는 자기기만이 타이레놀보다 낫다.      

반짝이는 빛을 품고 물결 일렁이는 바다에 쪼글쪼글해진 마음을 던진다. 오늘은 남미로 가볼까. 책장 숲속을 느리게 걷는다. 코너를 돌면 북미다. 남미와 북미 사이에서 갈등하다 국경을 넘는다. 사십대 아이엄마와 서너 살쯤 된 꼬마아가씨와 마주쳤다. 나는 상냥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행복포인트 적립중이에요. 부디 인사를 받아주세요. 목구멍에 걸린 생각은 언어로 승화되지 못했다. 아이엄마 눈에서 레이저광선이 발사됐다. 한방에 전사할 수는 없다. 나는 아이에게 손을 흔들며 안녕, 했다. 아이는 엄마를 한번 보고는 손을 들었다. 아이의 검지가 나를 가리켰다. 아이의 검지는 천지창조 아담의 손가락이었다. 나는 최대한 예쁘게 미소 지으며 아이의 검지를 향해 내 검지를 보냈다. 닿는다, 닿았나. 드디어 행복포인트…….

“어머!”

닿지 않았다. 아이엄마는 아이의 팔을 잡아당겼다. 나는 손바닥을 펴고 좌우로 흔들었다. 저 나쁜 사람 아니에요. 말해봐야 이미 늦었다. 치한으로 몰리기 전에 도망쳐야 한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사서가 나를 112에 신고하는 건 아닌지 몰라. 아, 행복포인트 적립하는 거 너무 어렵다. 상철씨 도와줘요. 헬, 프,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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