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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Oct 19. 2021

안녕하세요_2

안녕, 인사하면 행복포인트는 당연히 자동적립이다

6

꽝이다. 통발에 불가사리뿐이다. 큼지막하게 썬 벵에돔회덮밥은 날아갔다. 행복포인트를 적립 못한 탓이다. 반찬거리가 있나 없나. 텃밭을 훑고 냉장고를 수색한다. 텃밭엔 상추, 냉장고엔 옆집 해녀할머니가 준 김치밖에 없다. 비상식량 라면도 없다. 흰 쌀밥에 빨간 김치와 푸른 상추, 너무 초라한 저녁상이다. 식탁은 몬드리안인데 영양가는 제로칼로리 콜라다. 잘 먹어야 아프지 않은데, 아프면 투정부릴 사랑스런 그녀도 곁에 없는데, 아, 섧다. 라면이라도 끓여먹을 생각으로 점방에 간다. 2킬로미터는 걸어가야 한다. 오른쪽엔 붉게 물들어가는 수평선이 있다. 왼쪽엔 군데군데 눈이 남아있는 한라산이 있다. 시야가 좋아 뼈대까지 선히 보인다. 봄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온다. 저녁 풍광에 취하고 말랑해진 마음에 야, 기분 좋다.

“상철 월급 받안?”

점방 앞에서 상철씨를 토끼몰이 하는 두 남자. 딱 보니, 척이다. 경찰이 필요한 순간이다. 5분 안에 경찰이 출동할지라도 멍하니 구경만 할 수는 없다. 나는 쌈닭이 된다. 인사하는 것만이 행복포인트를 적립하는 게 아니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범죄의 현장 속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나를 알아본 상철씨가 고개를 숙였다. 낯빛이 창백했다. 도서관에서처럼 천진무구한 표정이 아니었다. 오른손에 들려 있는 스크류바가 녹고 있었다. 나는 과하게 손을 흔들며 상철씨에게 안녕, 인사했다. 남자 둘은 침을 퉤, 퉤 뱉고 담배연기를 뿜었다. 연기가 내 코앞까지 날아와 약을 올리고 사라졌다.

“상철씨 가요.”

어깨동무를 하고 도서관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상철씨는 머뭇거리며 남자 둘을 보았다. 고개를 어색스레 숙이며 인사했다.

“친구들 안뇽.”

상철씨는 인사를 받아주지 않는 남자들에게 연신 고갯짓을 했다. 억지웃음에 안타까울 뿐, 그만 인사하라고 다그칠 수 없었다.

“너 괴롭히는 애한텐 인사하지 말라고 했지.”

퍽. 웬 여자가 상철씨 등짝을 후려쳤다. 남자 둘은 쏜살같이 도망쳤다. 상철씨는 입을 삐죽이 내밀고 등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내 뒤에 숨어 여자 눈치를 살폈다. 여자는 씩씩거리며 분을 참지 못했다. 나는 폭력을 행사한 여자에게 상철씨 대신 항의했다.

“사람을 왜 때리세요.”

“당신 뭐야?”

여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친군데요, 왜요?”

나도 목소릴 높였다. 상철씨가 내 등을 토닥거렸다.   

“형아, 엄마야. 엄마한테 인사해. 인사 잘해야 이쁨 받아, 그리고, 또, 인사 잘해야 행복포인트 적립해. 행복포인트 마니, 마니, 적립해야 똑똑해져. 엄마가 그랬어. 나 얼론 머스크형아보다 똑똑해질 거다. 그래서, 또, 우주여행 엄마랑 갈 거다.”

상철씨가 처음으로 긴 문장을 조리 있게 말했다. 논리적으로 조곤조곤 설명하는 상철씨는 충분히 똑똑했다. 나는 종이에 벤 상처가 실금처럼 그어져있는 상철씨의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여자는 경계의 눈빛을 풀지 않았다. 누구보다 착한 상철씨를 닮은 엄마가 맞나. 모르겠다. 나는 여자에게 눈꼬리 내리고 입꼬리 올리고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제주에서 정말 멋진 친구를 만났어요. 상철씨한테 행복포인틀 배웠거든요.”  

상철씨는 다 녹은 스크류바 막대를 핥아먹고 있었다. 여자는 나와 상철씨를 번갈아 보고 부드럽게 말했다.

“철이가 멋진 친구예요. 고맙네요.”

그제야 눈빛에 온기가 돌았다. 여자는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었다. 나는 상철씨가 여자를 안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상철씨를 여자 앞에 세웠다. 어깨로 툭, 조금씩, 조금씩, 밀었다. 상철씨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장난꾸러기처럼 웃었다. 나도 똑같이 웃어주었다.

“간지러워.”

상철씨가 여자 옆구리를 간질이고, 가슴을 움켜잡았다. 여자는 내 시선을 의식하지 않았다.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까르르르 웃으며 상철씨 얼굴을 가슴에 묻었다. 나는 많이 부끄러웠다.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았다. 엄마와 아들의 애틋한 이야기를 읽는다. 아이는 남들과 조금 다르게 태어났지만 착하게 자라나 멋진 어른이 됐다. 엄마의 사랑과 아이의 노력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이야기에 가슴이 출렁. 때로는 엄마를 속상하게 하는 일도 있었겠지만 아이는 부지런히 행복포인트를 적립해나갔다. 지금은 타인에게 행복포인트의 기쁨을 가르쳐줄 만큼 똑똑해져 있었다.

“어버, 어버. 엄마 어부바.”

상철씨는 무릎을 굽히고 스키점프자세를 취했다. 여자는 펄쩍 날아올랐다. 상철씨는 여자의 엉덩이를 움켜잡았다. 여자는 슈퍼맨이 하늘을 날아가는 포즈를 취했다. 오른팔로 헤드락을 걸고 왼팔과 두 다리는 쭉 뻗었다. 아, 민망하다. 엄마와 아들은 연인처럼 자연스러운 데, 나는 몸 둘 바를 모르겠다.

“형아도 해리 밥, 밥줘.”

“집에 가서 저녁식사 같이 해요.”

치켜 올라간 치맛자락을 끌어내리며 여자가 말했다.  

“쪼아, 형아도 밥줘, 밥줘.”

상철씨가 앞서 걸어 나갔다. 여자의 허연 허벅지가 눈에 걸렸다. 눈이 질끈 감긴다. 어둠이다. 한 발짝 끌려가듯 쓱, 겁먹은 발걸음이 비겁해진다. 달라붙은 발바닥이 떨어지지 않는다. 눈을 감고 걸을 수 있을 만큼 나는 용감하지 않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상철씨를 앞질렀다. 상철씨가 뛰기 시작했다. 상철씨 힘들 텐데 엄마는 왜 내려달라고 하지 않을까. 까르르, 깔깔,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아, 부럽다. 질투심 100%까지 충전이다. 나도 사랑스런 그녀를 업고 뛰고 싶다. 오빠 달려. 세상 끝까지. 그래 달리자. 세상 끝에 뭐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상철씨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달려 나갔다.      


7

늦잠을 잤다. 고사리산책을 나가지 못했다. 롤러코스터를 탄다. 감정은 오르락내리락, 오늘은 바닥이다. 허전하다. 부슬비가 온다. 비를 맞으며 걷는다. 흘러가는 잿빛구름에 방전된 마음을 던지고, 은회색 바다에서 통발을 건진다. 오늘도 통발엔 손톱만 한 게 몇 마리와 불가사리뿐이다. 또 꽝이다. 요즘 자주 꽝이다. 이러다 맨날 꽝이면, 영양실조에 시름시름 앓다가 고독사. 아, 끔찍하다. 행복포인트가 모자라서 그런가. 불가사리를 빼고 미끼를 넣고 다시 통발을 던진다. 맑은 날만 계속되면 사막이 되겠지.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는 거다. 바닥을 기는 텐션에 로또를 선물한다. 오늘은 해리공주 궁디 팡팡, 우쭈쭈쭈 기분 좋아 하늘로 치솟은 꼬리를 만질 수 있으려나.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이라도 꿈꿀 수 있는 자유는 누구에게나 있다. 룰루랄라, 기대를 펌핑하며 도서관에 간다.      

해리 밥자리에서 누군가 부스럭거리고 있다. 둥근 엉덩이가 들썩인다. 상철씨는 아니다. 역시 만인의 연인, 우리 해리공주님. 천사들의 조공에 해리는 얼마나 좋을까. 어차피 오늘은 해리가 좋아하는 활어는 없다. 빈손이었는데 잘됐다 싶다. 나는 큼, 목을 가다듬고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

여자는 얼어붙었다. 한참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일부러 소리를 내며 물러났다. 소리가 멀어지자 여자는 뒷걸음으로 일어났다. 2층 열람실 사서였다. 마냥 흰 낯빛에 연지가 번지고 있었다. 여자는 장갑 낀 손을 뒤로 감추었다. 나는 눈꼬리 내리고 입꼬리 올리고, 고개 숙이며 다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말로는 처음 인사하네요. 매일 출근도장 찍는데, 저 아시죠?”

여자는 내 안녕을 안녕하게 받지 않았다. 여자는 안절부절못했다. 못된 어른에게 이유 없이 혼나는 아이처럼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나는 빨라지는 숨소리를 느꼈다. 감정에 노란불이 깜박이더니, 빨간불이 철컥 장전됐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침묵은 마침표를 찍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하찮은 존재라도, 사람이 사람에게 인사하는데, 뭐야? 손에 쥐약이라도 숨긴 거, 행복포인트 필요 없어. 나는 나를 무시하는 여자에게 방아쇠를 당겼다.

“아니, 아니, 내가, 뭐, 잘못했어요. 네? 혹시, 나, 경찰에, 스토커로, 신고한 사람, 맞죠?”

스타카토 리듬을 탄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여자는 더 깊이 고개를 숙이고 뒷걸음질 쳤다. 나는 여자의 손목을 낚아챘다.

“아 진짜 너무하네. 사람이 말하면 대꾸를 좀 하라고. 인사한 게 잘못이야. 행복포인트. 상철씨한테 함 물어보라고.”

여자는 떨었다. 겁에 질려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곧 까무러치기 직전이었다. 살려 달라,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여자가, 나는 안쓰러웠다. 바보 같았다. 나는 여자의 손을 놓았다. 여자는 순식간에 달아났다. 하,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걸까. 진짜 스토커가 된 심정이었다. 경찰이 내 손목에 수갑을 채워도 변명할 말이 없었다. 도서관에 오면 보호받는 느낌에 좋았는데, 이젠 아니다. 괜히 상철씨를 따라 행복포인트를 적립한다고 한 내가 싫어졌다. 도서관이 싫어졌다. 해리도 싫어졌다. 상철씨도 싫어졌다. 바다도 싫어졌다. 모든 게 싫어졌다.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는데, 다 끝났다. 나는 해리의 사료그릇과 물그릇을 걷어찼다. 여자가 깔아놓은 알록달록한 꽃무늬 담요를 짓밟았다.     


8

점령당했다. 다시 불행이 왔다. 행복의 문이 닫혔다. 보호막은 갈가리 찢어졌다. 50년도 넘은 초가집이지만 축복이었던 내 보금자리가 감옥으로 변했다. 열흘 넘게 집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온종일 이불을 뒤집어쓰고 방에서 뒹굴었다. 새벽에 고사리를 꺾으러 나가는 것도 재미없었다. 통발로 반찬거리를 구하는 일도 흥미가 사라졌다. 해리를 만나 밀고 당기는 것도, 책장 숲을 헤치며 이상형을 찾는 것도 모두 재미없었다. 행복포인트를 적립하겠다고 인사하는 것도 부질없었다. 뎅 뎅 울리는 종소리도 싫고, 휘익 휘익 울어대는 동박새 소리도 짜증났다. 도저히 허기를 참을 수 없으면 라면을 끓여 밥을 말아먹었다. 음식물찌꺼기 썩어가는 싱크대에선 고약한 냄새가 났다. 퉁퉁 불어버린 면발과 살찐 구더기 같은 쌀알을 보니 구토가 치밀었다. 나는 마당으로 나와 바다를 보았다. 바다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눈이 녹아 뼈대가 더 선명해진 한라산도 여전히 근사했다. 바다, 하늘, 산, 모두 제몫을 다하며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다. 세상은 그대로 있는데, 나만 지옥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다. 천국은 어디에 있나 주위를 둘러본다. 마당은 돌보지 않은 무덤처럼 변했다. 홀로그램이 탈춤을 춘다. 미친놈인가, 폐인이 되어버린 난가. 같이 춤출까. 싸울까. 도망갈까. 무릎까지 올라온 잡초를 뽑으며 나는 중얼거렸다. 그때 누군가 나를 흔들었다. 죽어있던 휴대폰이 주머니 속에서 부활했다.

형아보고시프다사서누나도.

상철씨 문자다. 팍, 스포트라이트가 켜졌다. 행복의 문이 손짓했다. 한 발만 내디디면 문이 열린다고. 감정에 파란불이 들어왔다. 응어리가 녹아내렸다. 행복은 어디에, 어느 장소에 있는 게 아니었다. 행복은 내 마음 속에 있었다. 나는 눈꼬리 내리고 입꼬리 올리고, 문자를 다다다다다다다다 보냈다.

상처ㄹ시 혀ㅇ아더 보그시브다 우리 마ㄴ나ㄹㄲㅏ?

어, 망했다. 엉망진창이다. 급할수록 돌아가라 했는데, 한 단어도 제대로 쓰지 못했다. 엄지척, 엄지 너는 오늘부터 다이어트다.      


9

에메랄드빛 바다에 은빛 물고기 노닐고,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 흐른다. 더불어 시원한 바람이 몸을 상쾌하게 어루만진다. 일 년 중 최고의 날씨다. 길을 걷다 눈빛만 스쳐도 풍덩, 사랑에 빠질 것 같은 완벽한 날이다. 경찰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속도를 낮춘다. 차창 밖으로 손이 나온다. 손가락이 피아노 치듯 리듬을 맞춘다. 나는 피식 웃으며 경찰차에 손을 흔들어준다. 경찰은 이제 내가 모르는 사람에게 인사하는 이유에 대한 수사를 끝낸 걸까. 행복포인트 의미를 유레카 외친 걸까. 한 번의 큰 파도로 해변의 쓰레기를 모두 치울 수는 없다. 작은 파도라도 여러 번 반복되면 언젠간 해변은 깨끗해질 것이다.     

도서관에 왔다. 해리를 찾아 둘러보지만 레이더에 걸리지 않는다. 해리가 나를 버리고 새로운 연애상대를 찾아 떠난 건 아닐까. 조금 서운해진다. 밥자리가 잘 정돈돼 있다. 사료는 가득 담겨있고 물도 갓 따라준 듯 신선하다. 꽃무늬 담요가 혀를 찼다. 못난놈. 나는 내 관자놀이를 쥐어박았다. 담요 위 나뭇잎과 먼지를 털어냈다. 가슴을 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린 눈에 물기가 어렸다. 나는 물기가 마를 때까지 해바라기를 했다.      

2층 열람실 문 앞에 섰다. 한 발만 다가가면 문이 열릴 것이다. 미안해요, 사과를 할까. 안녕하세요, 인사를 할까. 망설이다, 주저하다, 갈팡질팡하는데 문이 열렸다. 휩쓸리듯 안으로 빨려들어 갔다. 나는 결심했다. 먼저 인사를 하고 사과를 내밀기로. 나쁜 마음이 아니었으니 여자도 내가 인사한 이유를 알아주리라. 안내데스크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고백을 하는 것도 아닌데 너무 떨린다. 목표를 찾는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동안 수평선에게 배운 게 아무 소용없다.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눈꼬리를 내리고 입꼬리를 올린다. 이빨에 힘이 들어간다. 이제 고개를 숙이고, 손에 쥔 사과를 내밀며 안녕하세요, 하면 인사가 완성되는데, 그런데 고개가 숙여지지 않는다. 어금니에 통증이 온다. 아무리 좋은 의도라 할지라도 상대가 원치 않는다면, 안 하는 게 맞다. 왜냐고 묻고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 모두 내 욕심일 뿐이다. 나는 체념했다. 급히 돌아서는데 쾅, 벼락이 쳤다. 찰나의 순간이 뇌리에 박혔다. 여자의 눈동자가 나를 쫓고 있었다. 목적이 뚜렷한 눈빛이었다. 나는 돌아서서 여자에게 걸어갔다. 여자는 천천히 일어났다. 눈을 맞추고 고개를 숙이고 입모양으로 안녕하세요, 인사했다. 아, 갑자기 눈물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완벽한 날에 비가 올 리 없는데, 젖고 싶지 않았다. 나는 책상을 붙잡고 고개를 숙이고 입모양으로 안녕하세요, 인사했다. 사과를 건네지는 못했다.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인 여자의 손이 눈에 걸렸다. 아, 손가락이 여덟 개였다. 오른손엔 검지와 엄지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눈이 감겼다. 툭. 무언가 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먼저 인사해줘서 고마워요.”

여자의 왼손이 오른손을 보호하고 있었다. 그 왼손을 내 오른손으로 보호해주고 싶었다. 여자는 눈을 끔벅일 뿐, 내 눈을 피하지 않았다. 나는 목례하고 돌아서서 심호흡을 했다. 끝없이 추락하는 그것의 비명소리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나는 오른손으로 눈 밑을 훔쳐내면서 걸었다. 차르르르, 차르르르. 행복포인트 적립되는 소리가 따라왔다.      

늘 앉던 자리가 비어 있다. 그 자리에 앉으면 언제나 기분이 좋다. 창밖 바다에 시선을 던진다. 오늘따라 바다에 그늘이 없다. 바다에 내 마음의 그늘을 던진다. 오늘은 중세 시대로 여행을 떠난다. 표지를 쓰다듬고 책장을 넘긴다. 나는 오래된 이야기가 좋다. 손 벨 염려 없는 낡은 책이 좋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만나게 되는, 밑줄 그어진 한 줄의 욕망이 좋다. 이 문장 훔치고 싶다. 같은 욕망에 나도 밑줄을 긋고 싶어진다. 문장을 훔쳤다고 경찰에 쫓기는 일은 없을 테니깐.     

한겨울 칼바람에 떨다 책장을 넘기면, 어느새 한여름 한 가운데에 와 있다. 이글거리는 태양에, 짙은 여름 냄새에, 흠뻑 취한다. 시에스타에 빠진 그녀를 깨울 수 없다. 영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고개가 무거워진다. 그녀 뺨에 내 뺨을 살포시 포갠다. 눈꺼풀이 뽀뽀를 한다. 초콜릿 향이 난다. 분명 사랑스런 그녀의 향기다. 바람이 분다. 눈시울이 간질간질하다. 하얀 손이 건네는 노란색 포스트잇과 초콜릿.

내일 해리집짓기 바자회를 해요. 해리가 새끼를 네 마리나 낳았거든요. 꼭 오세요.

망했다. 사랑스런 그녀 이마에 침을 흘렸다. 그녀 이마에 포스트잇을 붙이고 수평선에 눈높이를 맞춘다. 바다는 여전히 그늘이 없다. 햇살은 여전히 따듯하다. 바람은 여전히 시원하다. 입가를 닦고 좌우를 둘러본다. 왼쪽에도 없고 오른쪽에도 없다. 하나, 둘, 고개를 휙 돌리면 그녀가 있을지도 모른다. 심쿵.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심장이 뛴다. 용기가 절실한 순간이다. 뒤를 돌아보자마자 완벽한 미소를 머금고 안녕하세요, 인사해야겠다. 누군가 앞에 서면 자동문이 열리듯 안녕, 인사하면 행복포인트는 당연히 자동적립이다. 차르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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