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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닙 Sep 16. 2022

TV 화면에서 유독 잘 보이는 것들

직업병

방송영상디자인을 업으로 삼게 되면서 TV를 볼 때 프로그램 내용에만 집중해서 시청할 수만은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혼자만의 주말, 좋아하는 개그맨이 출연하는 예능 프로를 본다. 정신없이 웃다가 문득 시선이 TV 화면 상단으로 향한다. 채널 로고에 순간 스쳐 지나는 작은 꿈틀거림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로고 애니메이션이란 주로 그런 식으로 나에게 발견된다.


각 채널에서 로고에 애니메이션을 적용해 시청자에게 티 내고 싶어 하는 메시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시청자 여러분, 우리 벌써 개국 10주년이에요. 축하해주세요!’

‘여기 주력 컬러는 블루예요. 옆 집이랑 이미지가 다르지 않나요?’

‘이 로고 위에 눈알만 그리면 웃는 얼굴이 됩니다. 짠! 귀엽죠?’


만약 채널에서 홍보하고자 하는 주력 프로그램이나 중계가 있다면, 프로그램 중간 광고나 전, 후에 해당 프로모션 예고를 내보내는 게 전부가 아니다. 대부분의 공격적인 프로모션은 당신이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 바로 그 화면에서 이미 선보이는 중이다. 특히 명절이나 신년, 연말 혹은 기타 기념일 등은 각 채널들이 오른쪽 상단 채널 로고에 다양한 모션그래픽으로 새로운 디자인 시도를 선보인다.


안부를 묻고 응원을 전하는 문장들, 기발한 캐릭터와 아이콘, 트랜지션까지 구경하다 보면 보통 5-10초 내외로 짧게 지나가는 모션을 보려고 1분가량은 멈춘 로고가 다시 움직이길 기다리며 계속 응시하게 되는데, 그러다 프로그램 내용을 좇는 건 뒷전이 되고 만다.


오른쪽 상단의 채널 로고 바로 아래에는 버그가 계속 돌아간다.

로고만 있다가 다양한 형태의 이미지가 펼쳐지며 채널이 주력으로 밀어주는 프로그램의 MC 사진이나 프로그램 성격을 대표하는 문장을 띄우고 마지막에는 로고, 편성 시간을 홍보하고 다시 자취를 감춘다. 1년 전만 해도 ‘대왕 버그’라고 부를 정도로 면적을 크게 부풀려 너도나도 화려하게 노출했지만 최근에는 크고 가독성 좋은 로고를 가능한 미니멀하고 심플하게 축소하는 추세라 채널 로고 가로폭 기준으로 덩달아 버그의 폭, 사이즈도 유행처럼 작아지고 있다.


프로그램 시청 중에 볼 수 있는 OAP 제작물은 화면 상단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번에는 하단의 자막 바로 눈이 간다. 색감과 디자인, 좌에서 우로 흐르며 지나가는 정보성 텍스트의 폰트에도 눈이 따라간다. 하단을 덮는 자막 바 또한 채널 네트워크 디자인 가이드에 따라 왼쪽 혹은 오른쪽 정렬로 화면 가로넓이의 절반 정도만 화면을 덮어 여백을 주기도, 화면 하단을 완전히 덮기도 한다. 하단의 자막 바에는 긴 텍스트를 오래 띄울 수 있기 때문에 흥미로운 핵심 줄거리를 함축하여 노출하거나, 얼마나 임팩트 있는 경기가 펼쳐질지 시청자의 기대감을 유발하는 문장이 쓰인다.

프로그램 중간이나 전후로 끼어있는 티저와 예고가 얼마나 나를 집중시키는지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다.


당신이 OAP디자이너가 하는 일들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TV를 시청하면 비로소 잘 보이는 것들이 있다.

시청자가 TV 시청 중에 시선을 빼앗기는 그 모든 것이 우리의 보람이자 노림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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