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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닙 Mar 02. 2023

퇴사하니 기분이 어떻냐고 묻는다

10년 차 직장인, 봄이 오기 전에 퇴사했습니다

별안간 고백하건대, 나는 퇴사했다.


10년간의 직장생활을 마쳤다.

유치원,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쳐 곧장 대학에 진학했다. 졸업 직후 첫 직장을 구했고 세 달 동안 인턴으로 일한 경력을 밑천 삼아 일사천리로 첫 번째 정규직 자리를 구했다. 회사에서 만난 인연이 연인이 되어 새 일자리를 소개해주었고 프리랜서라는 이름표를 달고 방송국에 입사했다. 그렇게 아홉 시 출근, 여섯 시 퇴근의 삶을 지속하는 말만 프리랜서, 성실한 무기계약직의 생활을 계속하며 선배들의 응원을 등에 업고 부지런히 면접을 보러 다녔다. 머지않아 타 방송사의 정규직으로 합격했다. 합격 전화를 받던 날의 기쁨이 아직도 생생하다. 든든한 입사 동기가 네 명이나 되는 안정적인 환경이었다. 6년 남짓의 꾸준한 출퇴근을 반복하다 무기력이 찾아올 때쯤 새로운 직장으로 이직했다. 입사한 지 2년 4개월이 지났다. 올해 2월은 매년 찾아왔던 여느 2월과 다르지 않았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1월 말까지 꾹 참았던 퇴사 선언을 2월 1일이 되자마자 저질렀다는 거다.


오늘은 만인의 공휴일인 3월 1일이 지난 3월 2일. 즉, 내가 비로소 퇴사를 실감할 수 있는 첫날이자 새로 입주한 공동 작업실에 개인 사업자로서 첫 출근한 날이었다.

이 날의 기분은 다시 찾아오는 감정이 아니라며 기록해두길 권하는 프리랜서 선배의 조언에 따라 프로랜서(프로+프리랜서)로 진화하기 이전의 생생하고 서툰 소감을 남겨본다.


지인들이 퇴사하니 기분이 어떻냐고 물어왔다. 아직은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대답했지만, 몇 가지 확연히 다른 점이 있다.

첫째로 점심시간에 햇볕을 많이 쬘 수 있었다. 밥을 먹고 산책을 하는데 시간이 12시 40분이었다. 상암동에서 1시 이전까지는 아득바득 사무실 바깥에서 숨을 쉬었다. 12시 58분까지 회사 로비에서 버티고 버티다 출입증을 찍고 엘리베이터에 올라 사무실로 돌아갔었다. 보이지 않는 줄에 묶여 팽팽히 당겨지기라도 하듯 끌려 들어갔다. 하지만 오늘의 산책은 달랐다. 오후 1시까지 마무리짓지 않아도 되었다. 철근같던 줄이 뚝 잘려나가 느슨하고 허무했다. 12시 58분의 공기에 비해 1시 5분의 공기는 유난히 산뜻했다.

둘째로 산책하는 사람들과 주변 건물이 보이고 거리의 목소리, 음악이 들렸다. 직장인일 때는 틈만 나면 그저 머리를 비우고 멍 때리기 바빴다. 바쁘게 멍을 때린다는 표현이 이상하지만 무척 적절하다. 북적이며 적막한 사무실에 앉아있는 것 만으로 몸과 마음이 지쳤었다. 주변을 돌아보고 귀 기울일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퇴사를 하니 상가 건물에 붙은 간판도 새롭게 보인다. 세상엔 이렇게 사장님이 많구나. 이 분들은 어떤 하루를 보내실까.

셋째로 상상력의 한계를 체감했다. 조용한 사무실에서 쉬지 않고 일하다가 화장실을 오가며 아픈 어깨나 두어 번 돌려대던 습관처럼 오늘도 새 작업실에서 움츠린 채 작업만 하다 화장실에 갈 때만 자리를 비웠다. 어라, 이게 아닌데? 잘 쉬기 위해선 창의력이 필요하다. 퇴사하면 이걸 해야지, 저걸 해봐야지 했던 소박하거나 거창한 계획을 모조리 적어놨어야 했다. 실컷 늦잠 자기, 작업실 근처의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책 읽기, 한창 일하다 말고 산책하기, 바쁘디 바쁜 아침 시간에 집 앞 개천을 따라 뛰기. 그리고 또 뭘 할 수 있을까? 그 많던 희망 사항은 어디로 간 걸까? 퇴사 이전 고생한 스스로에게 충분한 보상을 할 수 있도록 기발한 휴식 창의력이 필요하다. 곧 봄이니까 창의력을 발휘해 한 가지 결심해 본다. 올해 봄은 꽃을 실컷 봐야겠다.

넷째, 퇴근 시간이 없다. 프리랜서니까 자율적으로 출퇴근할 수 있다. 하지만 퇴근 시간에 대한 기준이 없으니 오히려 퇴근을 망설이게 된다. 오랫동안 누군가의 눈에 띄기 위해, 혹은 띄지 않기 위해 퇴근해 왔다. 저녁에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닌데 지금 집에 가도 되는 건가? 더 할 일이 없나? 오늘 경험하기 전까지 혼자 하는 퇴근이 고민할 주제인지 몰랐다. 결국 평소 퇴근하던 시간보다 한시간 가량 일찍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일어났다. 작업실을 나오니 태양이 얼굴을 마주 보는 위치까지 떨어져 있었다. 온통 눈이 부셨다. 회사 사무실에서 창문 블라인드 틈새를 바늘처럼 비집고 들어와 집요하게 눈을 찔러대던 그 녀석과 드디어 온몸으로 마주했다. 해가 떨어지기도 전에 퇴근하다니! 갑자기 재채기하듯 웃음이 났다.


나는 10년 차 직장인이지만 0년 차 프리랜서다. 앞으로 익숙해질 것들 투성이란 얘기다. 다음번에 누군가 퇴사하니 기분이 어떻냐고 물으면 술술 대답할 수 있도록 마주하는 낯선 감정들을 성실히 기록해 둘 필요가 있겠다. 여전히 실감은 나지 않지만, 퇴사하니 기분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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