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부부 동반퇴사 후 세계여행 Ep2
내가 퇴사를 하고 유럽여행을 갈 때쯤 남편이 '나도 퇴사하고 같이 여행 갈까? 아님 너 여행 다녀와서 같이 여행 가는 건 어때?'라는 말을 했었다
난 그의 말이 진심이리라고 생각하지 않고, '좋지~ 근데 (너) 이직한지 얼마 안 됐으니까 n 년은 채워야 하지 않을까?'라고 말한 뒤 바로 그의 말을 머리 한켠으로 넘겼다.
워낙 우리가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기 때문에 그냥 '여느 날의 희망 사항이겠지. 설마 우리 경제상황에 진짜 둘 다 일을 그만두고 놀자는 말이 진심이겠어?' 라고 어림잡았다.
사실, 이제 열심히 30대로서 사회적/경제적 안정을 찾고 싶은 나에게 그의 발언은 믿고 싶지 않은 정도였다. 하지만 그 당시에 남편의 마음이 어느 정도인지 물어봐야 했나... 그의 말을 가볍게 넘긴 게 화근이었다. 그는 점점 더 노골적으로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시작된 (나만의) 전격 퇴사 후 부부 세계여행 가자는
남편 마음 되돌리기 프로젝트.
Ver 1. 부드러운 회유책
'여행 너무 좋지. 나도 너랑 세계여행 진짜 너무 하고 싶었고 혼자 유럽여행하는 동안 뭐든 너와 함께 경험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이 마음은 맹세코 진심이다.) 근데 어떻게 사람이 하고 싶은걸 다 하고 살겠어. 우리 일단 꿈을 간직한 채 열심히 일하고 계획해서 몇 년 뒤에 멋지게 떠나보자!'
하지만 남편의 마음은 내 예상보다 훨씬 커져있었다 나의 기약 없는 '몇 년 뒤' 따위의 표현은 그의 갈망을 더욱 커지게 할 뿐이었다.
남편은 본인과 내가 같은 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전혀 다른 마음인 것 같아서 놀랍단다. 또, 본인은 나를 그렇게 지지했는데 나는 마음 속에 '안돼.'라는 답을 이미 가지고 본인을 설득만 하는 것 같아 서운하다고 했다.
그래. 뭐 두 달 유럽여행에 퇴직금 팡팡 쓰고 온 나로서 할 말은 없다만, 나도... 구체적인 계획 없이 무조건적인 지지를 바라는 그가 답답했다.
그래서 회유책 따위 버리고, 강경책을 시작했다.
Ver 2. (힐난이 난무한) 강경책
말이 좋아 강경 정책이지, 논리로 너의 말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 알려준 다음 너의 생각을 꺾겠어.라는 아주 나쁜 마음이었다.
-난 30대 기혼자고, 이미 6개월 정도를 쉬었는데 여행까지 가면 1년 이상을 쉬어야 해. 나의 경력 단절은 어떻게 할래?
-집 대출금과 이자는?
-언젠간 부모가 되고 싶다며. 여행 후 자리 잡지 못하면 어떻게 할 건데?
-그런 계획이 있었으면 내가 퇴사하기 전에 미리 상의하고 자금 조달 계획을 세웠어야지 않아?
등등의 말들로 그의 마음에 찬물을 잔뜩 끼얹었다
연애부터 결혼생활 2년 차까지 거의 싸우지 않던 우리가 이 이야기만 하면 생각이 어찌나 다른지 서로의 말이 얼마나 말이 안 되며 앞뒤가 안 맞는지 따지고 들면서 감정이 상하도록 이야기했다
들어볼수록 당황스러운 부분은
그는 6개월에 끝나는 여행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여행을 지속하는 삶을 살 방법을 찾고 싶다고 했다.
(..? 점입가경이다..)
여행을 너무 좋아하는 나지만 여행가로서의 삶은 생각 해본 적이 없다. 일상이 치열할 수록 여행의 만족도가 높아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국 서로 감정이 상할대로 상해서, 갈것이냐 말것이냐를 결정하기 전 까지는 함께 여행유튜브를 보며 낄낄대는 시간 마저 누릴 수 없었다.
남편은 다른 사람들은 저렇게 마음먹은 것을 실행하는데, 우리는 집에 앉아 부러워만 하며 우리랑은 다른 삶이라고 선 그어버리는 것이 너무 답답하단다.
이번에는 나의 요청에 맞춰 실제로 이 여행이 가능할지 본인 나름대로 계산을 해왔다. 그런 그의 모습들을 보며 나의 생각을 다시 한 번 돌아보기로 했다.
개인적으로 퇴사 후 혼자 여행하는 동안 많은 것을 보고 느꼈는데, 그 기억이 나만의 것이라는 게 참 아쉬웠다. 남편과 함께 와서 이걸 누렸다면 평생 우리가 나눌 추억과 이야깃거리가 얼마나 많았을까 하는 생각에 다음부턴 이런 기억을 꼭 같이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긴 했다. 그 시점(너무 빠름)과 형태(돈 많이 벌어서 휴가로 여기저기 쏘다니기)가 나의 계획과 달랐을 뿐..
결국 나는 당장 세계여행을 너무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가 원하는 그리고 그에게 소중한 기억이 될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어서' 그의 제안을 승낙했다.
하지만 마음이 동하지 않은 승낙에는 거절보다 더 큰 후유증이 따른다는 사실을
둘 중 누구도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