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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니피아 Jan 26. 2023

드라마 '더 글로리'를 보며 드는 생각

요즘 유행한다는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를 봤다.

8화까지 나왔고 아직 더 있는 뒷이야기는 공개 전이다. 

유튜브에 누군가 리뷰해 놓은 영상을 보고 잠 오지 않는 밤에 정주행을 시작했다. 

대략 학교에서 따돌림당하던 송혜교(문동은 역)가 자신을 괴롭히던 불량 학생들에게 복수를 계획하고 실행하는 이야기. 

첫 화에서부터 몰입해 보고 쉬지 않고 8화까지 새벽 내내 보았다. 

자신을 괴롭히던 아이들에게 복수한다는 기본 구성부터 차근차근 준비해 가고 결국은 그들에게 똑같은 혹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준다는 권선징악(물론 아직 결론은 모르지만..)의 내용이 나에게 뭔지 모를 희열감을 주었던 것 같다. 


내 중학교 시절. 

나는 수도권에서도 꽤 부유하다는 사람들이 많이 산다는 분당으로 중학교를 배정받았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분당 옆에 있던 시골이었고 주로 배정받는 중학교는 과밀이라 몇몇 아이들은 더 멀리 떨어진 분당 내의 중학교로 배정받았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 학교에는 아이들 교육부터 꽤나 잘 사는 부잣집 아이들이 많았던 것 같다. 

그렇게 시작된 중학교 시절 내내 나는 선생님들로부터 그리고 몇몇 아이들로부터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 대한 무시를 듣고 살아야 했다. 

버스를 타고 구불구불 고개를 넘어가야 나오는 광주 오포는 스무 살 초반이었던 내 부모님이 새 인생을 시작하기 위해 정착한 곳으로 당시 나는 다섯 살 꼬마였다. 

그곳은 비가 많이 오면 으레 홍수가 나서 지대가 높은 곳으로 피신해야 했고 그때마다 집안이 구정물로 뒤덮이는 물난리를 겪는 일도 여러 번이었다. 

어릴 적 내 집은 대여섯 세대가 함께 모여사는 낡은 단칸방이었고 세대들은 공용 화장실 두 칸을 나눠 썼다. 

나중에는 집안 사정이 좀 나아져서 단칸방에서 빌라로 이사를 했지만 여전히 동네는 정신없고 개발이 덜 된 시골이었다. 

그에 비해 1기 신도시답게 구획이 나뉘어 체계적으로 지어진 분당은 내 동네와는 전혀 딴판의 모습이었다. 

그 당시 높은 지대에 있는 광주 오포와 낮은 지대에 있는 분당을 잇는 고개가 하나 있었는데 나는 매일 버스로 그 고개를 넘어 다녔다. 

그렇게 등하굣길 버스를 타고 높은 고개를 구불구불 올라가면 창밖으로 분당의 모습이 한눈에 보였는데 고급스러워 보이는 백화점과 높은 건물들의 불빛이 항상 반짝였다.  

저곳이 내 집이라면 좋겠다는 동경 그리고 내가 사는 그곳이 부끄럽고 창피했다. 


학교에서는 학생 중 누구라도 사고를 치거나 말썽을 일으키면 선생님들은 단박에 "너희 집 광주지?"라고 되묻곤 했었다. 실제로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소위 일진이라고 불리던 언니 오빠들은 나와 같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가끔 친구들이 "너 어디 살아? 너네 집은 어디야?"라고 물을 때마다 광주라고 대답해야 하는 게 싫었고 어쩌다 대답을 하면 "넌 광주애같이 안 생겼는데?!"라고 하는 대답이 은근 날 기분 좋게 했다. 

정확히는 날 안도하게 했다. '그래.. 나는 광주애같이 생기지 않았어'


그리고 중학교 3학년이 됐을 때 나도 그 따돌림이란 걸 겪었다. 

같이 어울리던 친구가 어느 날부터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는다.. 그 시작이 뭐였는지 왜 그렇게 시작되었는지는..

그 아이와 짝꿍이었던 나는 하루종일 그 아이를 눈치 봤고 같이 어울리던 친구들도 모두 나를 무시하고 따돌리기 시작했다. 

같이 도시락을 먹어도 마치 지저분하다는 듯이 내 반찬에는 손도 대지 않았고 말도 걸지 않았으며 내가 말을 걸어도 피했던 걸로 기억한다. 

선생님 지명으로 자리에 일어나 무언가를 발표하거나 대답을 할 때도 일부러 들으라는 듯 나에게 욕을 하고 야유를 했다. 

그 학년의 중간부터 학교에서 도시락으로 급식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급식비를 내놓고도 도시락이 없어져서 먹질 못했다. 

그런 일상이 계속되자 나는 점심시간이면 화장실 맨 끝칸에 들어가서 점심시간 내내 그 안에 있다가 나오곤 했다. 

화장실 맨 끝칸은 창문이 있어서 밖을 내다볼 수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보고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그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신체적인 위협이나 가해는 없었지만 정신적으로 나는 철저하게 배제되었고 무시당했고 없는 사람처럼 지워진 것 같았다. 


그렇게 중학교 3학년을 힘들게 보내면서 나는 방황했고 바빴던 부모님은 나에게 학교 생활을 잘하는 것에 대해 큰 기대도 관심도 없었다. 


비가 쏟아지던 날 우산 없이 학교에 걸어가 물을 뚝뚝 흘리며 교실에 들어간다던가 등하교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며 차 안에서 멍을 때린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려면 시험을 보고 일정 점수 이상을 받아야 했는데 그렇게 무너져버린 중학교 3학년 시절은 방황하느라 통째로 날려버린 듯했다. 

그런 와중에도 착실하게 문제집을 펴놓고 공부를 하던, 날 따돌리던 그 아이는 성실하고 건설적으로 고등학교 입학 준비를 했다. 

일찌감치 시험 준비든 인문계 고등학교든 포기해 버린 나는 수학시간에 일본어책을 펴놓고 혼자 공부를 했다. 

자연스럽게 나는 실업계 고등학교에 갔다. 


중학교 1, 2학년 시절 잠깐 같이 어울리게 되었던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 엄마는 분당에 있는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아주 열심히 하는 분이라고 했다. 구역예배는 물론이고 교회생활을 열정적으로 한다는 얘기를 친구에게서 자주 들었다. 

그날은 친구와 같이 우리 집에 놀러 가기 전에 잠시 친구집에 들렀을 때였다. 

친구네 집은 깔끔한 아파트였다. 널찍했고 집 안의 인테리어도 모두 고급스러웠다.

거실에 있던 그 친구 엄마에게 인사를 하자 그 친구 엄마는 내 이름이 뭔지 어디에 사는지 등을 물어보셨다. 

그리고 친구집을 나서 우리 집으로 향하던 버스 안에서 친구는 뜬금없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엄마가 너랑 놀지 말래"

"왜?"

"너 광주 산다고 광주 사는 애랑은 놀지 말래"

"...."

그때 버스는 분당에서 광주로 넘어가는 구불구불한 고개를 한창 넘어가고 있었다. 



나의 학창 시절을 추억해 볼 때 이 두 가지 사건이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이다. 

안타깝게도 이 두 가지 사건은 내 인생의 관념과 시각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대학생이 되었을 때 중학교 동창회에서 날 따돌렸던 아이와 전화통화를 할 기회가 있었다. 

그 아이가 먼저 날 따돌렸던 일에 대해 말을 꺼냈다. 나에게 미안하다고 했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그리고 미안하다는 말을 했건 안 했던 중요하지도 않다. 

정확히 기억에 남는 건 내가 그 아이에게 이미 모두 지나간 일이고 난 이제 괜찮다고 쿨한 척한 것이다. 

그렇게 말한 내가, 아무렇지 않다고 거짓말하고 나 스스로를 배신을 한 내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 

그때 차라리 그 아이에게 욕이라도 해줬으면.. 너 때문에 내가 너무 힘든 시간을 보냈고 그 힘든 시간들이 아직도 가슴에 박혀있다고 소리라도 질렀더라면.. 그러면 나는 좀 더 그 일에서 가벼워지지 않았을까?


아직도 가끔 그 일이 생각날 때가 있다. 

화장실 맨 끝칸에서 계속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어서 학교가 끝나길 기다리던 마음.

내가 사는 지역 때문에 받았던 선생님들의 차별들. 

성실하게 문제집을 푸는 그 아이 옆에서 눈치를 봤던 시간들.

어쩔 땐 그 아이가 이 일을 잊지 않았길 바랄 때도 있고 내가 겪었던 일들이 그 아이에게도 똑같이, 아니 혹은 더 한 고통으로 되갚아졌으면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도 가끔 생각나는 이 일들이 이제 나를 좀 자유롭게 해 주길 바란다. 

나는 괜찮지 않았고 아직도 나에게 상처가 되어 남아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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