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니모메

팽나무와 바다

by 이니마

외지에서 오랜 친구가 오면 자주 가게 되는 곳이 있습니다. 애월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는 팽나무가 있는 곳이죠. 어떤 풍경보다 익숙해서 마음이 놓인달까요. 지붕 처마처럼 길게 늘어진 가지 덕분에 나무 아래에선 거친 해풍도 잠시 호흡을 고릅니다.

이곳 마을에는 나이 많은 팽나무가 아직도 곳곳에 남아있습니다. 마을 입구에 지킴이 역할을 하는데 생김새가 독특하다 싶게 다 달라서 마을의 표식처럼 연상되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동네 사람들이 모여드는 쉼터이자 아이들의 놀이터였습니다. 갈수록 큰 도로를 내면서 잘려나가거나 회전축처럼 덩그러니 홀로 서 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반면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나이 많은 팽나무 중 하나는 여전히 마을의 신목으로 모십니다. 몸을 뒤틀며 뻗은 가지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신이 사는 집이 된 커다란 그늘을 가진 나무에는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으스스함 같은 게 있었습니다. 가지에 매달려 나부끼는 강렬한 원색의 오색천이나 하얀 종이들. 거기에다 그 앞에 놓인 제물들은 더욱 그런 느낌을 더했습니다. 나무와 인간 사이의 중간쯤 되는, 확실히 나보다는 거대하고 영적인, 다른 세계에 사는 존재였습니다.

인간이 생과 사를 의탁하는 자연은 신처럼 두려움을 주는 동시에 고단한 섬사람들의 일부가 됩니다. 마을의 수호신, 어머니의 어머니가 되어 마을의 역사를 나이테에 조용히 새기는 소리 없는 목격자입니다.

이런 팽나무가 있고 아담한 테라스에서 바다를 내려다볼 수 카페가 있습니다. 아무런 특징이 보이지 않는, 너무나 평범해서 팽나무와 한 몸처럼 보이는 하얀 건물입니다. 그러나 오른쪽으로 훤히 열린 테라스에서 보는 바다 풍경은 마치 셔츠 안에서 빛나는, 목에 걸린 보석 목걸이처럼 눈을 사로잡습니다. 지척에서 불어오는 해초의 시원한 내음, 수평선 위에 곡선을 그리며 날렵하게 오르내리는 바닷새들, 운이 좋다면 돌고래의 유영을 볼 수도 있겠죠. 조금 오래 있을 시간이 있다면 아, 서쪽 바다를 물들이는 낙조는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카페 공간의 중심에는 몇 개의 커다란 초가 층층의 하얀 레이스 무늬를 만들면서 시간의 형상을 만듭니다. 창문을 주위로 둘러있는 선반 위의 오래된 카메라, 벽에 걸린 오래된 물건들-은 자신들의 여행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늘어놓는 수다쟁이입니다.


며칠 전 우연히 이곳에 있었던 어떤 커플의 결혼식을 보았습니다. 신부의 하얀 면사포와 드레스가 바다를 배경으로 나풀거리고 나지막이 들리는 하객들의 잔잔한 웃음소리가 밴드가 연주하는 재즈 음악에 불규칙한 화음을 넣습니다. 팽나무 가지에 작은 장식용 백열전구들이 흔들리고 가지 끝에는 풍경이 청명한 소리를 내며 이 풍경을 찬미합니다. 보드라운 연둣빛 잔디의 생기로움이 여름 끝에 걸린 더위에 지친 몇 마리의 개들을 다소 진정시켜 줍니다. 앙증맞은 유리컵에 담긴 딸기 티라미수를 한입 베어 물고 한동안 바다를 바라봅니다. 달콤한 시간이 붉은 해와 함께 바닷속으로 서서히 가라앉습니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면 너는 멀리서도 보이게

일찌감치 나와서 고개 쭉 빼고 기다리고 있었다.

봄이 되면 바지런히 물을 끌어올려

새순을 틔우는 소리.

그 노래 흥얼거리는 걸 보는 즐거움이란.


여름 태풍, 마을로 들이치는 고난의 바람 앞에

꿋꿋이 버티고 섰구나.

여인들이 너를 잡고 설운 눈물에 엉킨 말들을 토해낼 때도

넌 가만히 듣고 있었다.

낮의 더위가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날

동네 노인들 잠시 등을 펴고 눕게 하여 솔솔 부채질했다.

비가 후드득 떨어지기라도 하면

두 손 올려 머리 감싼 아이들 너에게 달음박질했지.


하늘이 살굿빛으로 물드는 저녁

어둑한 공기가 마을 가득 채울 때

너는 도드라진 핏줄 당당히 하늘로 뻗어 올린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고

내가 떠나도 여전히 그 자리에 지키고 서 있겠구나.

그리고 내 아이의 아이가 와서 앉을 때

새들 친구 불러와 오래된 이야기 들려주는 너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