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모품인데 왜 정이 들까
유독 버리기 힘든 것들이 있다. 나에게는 지갑과 신발이 그렇다. 중학교 입학 기념으로 엄마가 사준 지갑은 첫 직장을 떠날 때까지 쓰다가, 이제는 서랍 속에 고이 간직해뒀고 여행갈 때마다 같이 간다. 웬만한 신발은 다 떨어져서 못 신을 정도가 되도 한두해 정도는 신발장에 더 뒀다가 버린다. 왜 정이 드는걸까.
10년 전쯤 친구들이 한라산에 오르고 싶다고 했다. 등산에 별다른 취미가 없던 나는, 등산화를 새로 사기는 아까워서 친구의 친구가 사놓고 안 신는 걸 넘겨 받기로 했다. 그렇게 건너건너 나에게 트래킹화 하나가 생겼다.
그 트래킹화는 비바람이 몰아쳤던 한라산을 시작으로, (주로 신발장에 고이 모셔져 있다가) 여행을 가서 가끔씩 산을 탈 일이 생기면 꺼내지고는 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등산의 재미를 깨닫고, ‘슬슬 산을 좀 열심히 타볼까..?’라는 생각을 가지고 관악산을 오르던 날, 산 중턱에서 밑창이 떨어지며 명을 다했다.
산 중턱의 바윗길에 덩그라니 떨어진 밑창을 줏어 가방에 넣고, (다행히 바위산이라 얇은 바닥으로도 오를만 해서) 한쪽은 밑창이 없는 채로 나머지 등산을 마저 하는데 왠지 기뻤다.
누군가에게는 쓸모가 없어서 나에게 왔지만, 자주는 아니어도 잘 쓰이다가 그 마지막을 산에서 맞이했으니- 트래킹화로 나쁘지 않은 삶(?)을 산 것 같아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