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남았으니 충분해
시작은 남편의 한 마디
남편이 말했다. “나는 백일 사진이 없어. 그래서 우리 로아는 꼭! 백일 사진을 찍고 싶어.”
연애할 적부터 의아한 점이 있었다. 유독 남편은 어린 시절 사진이 많이 없달까. 그나마 유일하게 포획한 아가 때 사진 한 장은 남편임을 알아볼 수 없는 사진이었다. 누가 봐도 그 아이는 에겐남으로 클 수밖에 없는 용모였다. 그런데 지금 내 옆에 있는 이 사내는 블루 드 샤넬의 내음을 풍기고 다니는 테토남일 확률 99.99%의 수컷남성이다. 자라면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무튼간 남편의 그 말 때문에 로아의 백일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호텔 백일잔치 좋지, 내가 그걸 모를까
백일잔치를 벌이려고 하니, 또 다시 선택의 시간이 다가왔다. 호텔, 파티룸, 뷔페까지. 장소부터 후보지가 너무 많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최상의 장소는 호텔. 우아한 분위기, 호텔 로비의 광택, 사진 잘 받는 포토월, 정돈된 테이블 세팅, 그리고 무엇보다 코스와 뷔페의 안정적인 퀄리티까지. 손님 응대는 매끈하고, 고급스러운 메뉴가 줄줄이 나온다. 이 모든 장점, 내가 그걸 모를까.
좋다, 좋아. 다 좋은데... 예쁘고 맛있는 만큼 준비는 커진다. 누구를 초대할지부터 난항이다. 게다가 외출 시 싸들고 가야 할 짐까지.
남편은 또 "자기만 믿어!"라고 말할 터이고, 백일잔치를 준비하는 사이 내 몸과 마음은 한층 더 퀭해질 것이다. 예쁜 건 호텔이고, 맛있는 건 호텔이 맞다. 그런데 기회는 또 있다. 돌잔치라는 더 큰 산도 남았잖나. 그러니 결론은 단순하다. 반짝임과 만찬은 다음에 맡기고, 오늘은 몸과 마음이 편한 쪽을 고른다. 장소는 집. 시간은 점심, 등장인물은 열 몇 명 남짓, 내용은 포토슛 팝팝팝!
이 세 가지면 충분하다.
D-1 거실을 비우고 백일을 채운다
때는 바야흐로 백일잔치 디데이 며칠 전. 장장 세 달 동안 신세 졌던 친정집을 벗어나 드디어 2차 독립을 감행했다. 로아가 남편과 나의 홈스윗홈으로 들어온 우리 둘만의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그런데 문을 닫고 숨을 고르기도 전에, 사람들에게 로아의 생존을 알리는, 첫 이벤트가 찾아왔다.
백일잔치 며칠 전, 인터넷에서 주문한 백일상이 도착했다. 그리고 디데이 바로 전 날 저녁, 우리는 거실 한쪽을 비웠다. 그런데 금방일 즐 알았던 세팅에 의외로 진땀을 뺐다. 예상외로 테이블이 여간내기가 아니었던 것. 둘이서 낑낑거리며 테이블을 거실 창문 끝으로 밀어놓았다. 그래도 꾸며놓으니 그럴싸했다. 한복도 미리 입혀봤다. 로아는 씩 - 하고 웃더니, 대략 2분 17초 만에 머리띠를 집어던졌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내일은 '무조건 속전속결'이다!
D-day 우리에게 필요한 건 스피드
여행은 가기 전에 계획을 짤 때 가장 설레는 법이다. 왜냐하면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조합으로 구상을 하니까. 대본도 마찬가지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구성을 글에 녹여낸다. 그런데 내가 생각한 대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백일잔치도 다르지 않다.
집에서 하는 백일잔치를 계획할 때는 '아, 이렇게 집에서 가족끼리만 하면 얼마나 여유로울까?' 했다. 백일상을 차리면서는 '오~ 그래도 사진 잘 나오겠는데' 싶었다. 근데 막상 현실은?
원래 계획은 담소부터였다. 근데 그럴 틈은 없었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순간 포토타임이 시작됐고, 그때부터 모든 게 이어달리기처럼 돌아갔다. 먼저 온 사람이 나중에 온 사람 찍고, 우리는 번갈아 찍히고, 로아는 줄곧 주인공. 창가에서 상 앞으로. 소파에서 바닥으로, 피사체는 고정된 채 장소만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샷 리스트는 금세 끝났다. "로아 씨 여기 보세요", "한 장만 더 찍고 가실게요"의 무한반복. 중간에 한 번은 울고, 또 까르르 웃기도 많이 웃었다. 점심 햇살은 쨍하고 셔터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오늘은 대화보다 셔터가 훨씬 바빴다.
그리고... 떡으로 담소의 안주를 삼기에는 생각보다 배가 많이 고팠다. 한국인에게 필요한 건 역시 밥! 작은 떡보다는 예약해 둔 한식당으로의 외출이 시급했다. 집 근처 한식당으로 대이동. 룸에 들어가서 유모차 세우고 의자 맞추니까 "아, 드디어 앉았네!" 이 말이 절로 나왔다.
탄수화물과 따끈한 국물이 좀 들어가 주니, 그제야 진짜 대화가 시작됐다. "머리띠는 언제 날아갔지?", "누가 제일 많이 찍었지?" 다들 웃었다. 하루 속도가 그제야 느려졌다.
꿀잠은 덤
백일잔치를 마무리한 뒤 집에 오니, 피곤이 눈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그래도 애써 참고는 카톡으로 보내진 가지각색의 사진들을 취합했다. 가족들의 흔적이 담긴 사진 폴더에는 이름이 붙었다. 로아 백일 사진. 남편의 숙원은 이루어졌다. 스크롤이 꽤 길었다. 사진을 보다 보니 눈이 더욱 무거워졌다. 나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루 종일 하.하.하.하.라는 이상한 웃음을 지으며 긴장했던 남편과 웃고 우느라 정신없었던 로아까지. 우리 셋이 동시에 기절했다는 게 맞다.
다음 날 아침, 파스가 나를 반기고 있었다. 남편과 나는 나란히 서로의 등에 파스를 붙여주었다. 어제 못다 본 사진들도 함께 봤다. 둘 다 똑같이 반가웠다. 사진도 충분하고 잠도 충분했다. 그래서 그날이 오래 남는 것 같다.
계획할 때의 설렘도 좋았지만, 막상 끝나고 보니 이게 진짜였구나 싶었다. 완벽한 구성보다는 자연스러운 순간들이, 이상적인 조합보다는 그때그때의 웃음이 더 남았다. 그래서 집을 택한 우리의 방식이 나에게는, 우리집에는 딱 들어 맞았다.
다음 편
https://brunch.co.kr/@initialaction/16
전체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