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예산으로 걸작을 만드는 법

완벽 말고 생존: 오늘도 잘 살아남읍시다

by 심야초

프롤로그

INT. 집 거실 - 낮.

역류방지쿠션 위에서 타이니 모빌을 보고 있는 아기. 소파에 잠시 누운 엄마는 핸드폰을 집어든다. 어깨너머로 보이는 인스타그램 화면. 릴스를 넘기면 온갖 육아용품 광고가 즐비하다. 오늘은 매직캔 휴지통이 눈길을 잡아끈다.


엄마(V.O.)

육아의 세계는 엄마를 쉽게 위축시킨다. 예산이 곧 ‘퀄리티’처럼 보이는 시장. 오늘도 피드에는 새 모델, 새 기능, 새 필수템이 뜨고, 제목엔 안전발달이 걸려 있다. 그러다 보면 ‘그걸 안 쓰는 엄마’는 곧 ‘나쁜 엄마’가 되는 것만 같다.

1초에 2억을 썼다는 영화 <아바타>. 자본의 힘이 아니었다면 그 정도의 퀄리티를 보여줄 수 있었을까. 그런데 안타깝게도 내가 만드는 영화는 저예산이다. 그것도 엄청난. 자녀 양육에 3억 이상이 드는 국가에서 감독인 내가 취해야 할 전략은 단 하나다. 최대한 가성비 좋게 버티기.


1. 정보 전쟁에서 살아남기

결혼 준비를 하는 사람들은 선택의 늪에 빠진다. 식장, 드레스, 웨딩 스튜디오, 메이크업, 혼주 한복, 신혼여행, 하다못해 청첩장 재질 하나까지.

그런데 말입니다. 내 기준, 유아용품의 세계에서 선택을 논하자면 결혼 준비는 명함은커녕 예선 등록도 못한다. 물론 유퉁 같은 분은 예외. 결혼 준비에 '헉' 소리가 난다면 육아는 '악' 소리가 난다.


저출산이란 논제 앞에 정부에서는 가지각색의 지원 정책을 내놓지만, 제아무리 좋은 지원이 있어도 모르면 무슨 소용이게요? 모든 것은 스스로 알아보고 신청하지 않으면 절대 혜택을 받을 수 없다. 태어나자마자 하는 출생 신고, 부모급여 신청. 임산부 꾸러미. 혜택이든 지출이든 뭐든, 육아에 관한 모든 것은 내가 직접 알아봐야만 한다. 그렇다고 뭐 도서관에라도 가서 육아책을 살펴볼 건가.


결혼식은 웨딩 플래너라도 있지. "돌잔치는 어떻게 준비하시겠어요?", "등원복은 어떤 브랜드의 옷을 사세요, 어머님"하며 나를 이끌어줄 육아 플래너는 어디 에도 없다. 있어도 무진장 비싸겠지. 하다못해 오은영쌤의 조언 한 마디라도 들으려면 <금쪽같은 내 새끼>나 <오은영 리포트>라도 시청해야 한다. 아니면 <하정훈쌤의 삐뽀삐뽀 119>를 보던가. 정보를 얻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전자 기기를 끼고 살게 된다. 는 비겁한 변명입니다 어머님



INT. 병원 개인 병실 - 밤.

창밖으로 저녁빛이 누워든다. 아이패드를 보며 부부가 머리를 맞대고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


나 : (작게) 이름... 오늘은 꼭 정해야 돼요. 이름 없으면 출생신고도, 어린이집 대기도 못 넣어.

남편 : (아이패드로 작명소에서 받아온 이름을 다시 보며) 응. 후보 다시 보자. 로아? 서연이? (속삭이듯) 로아는 어때? 소리 예쁘고, 부르기 편하고.

나 : (입으로 굴려보다) 로아? 로아.. 로아.. 롸롸... 뭔가 이상한데... 아닌가... 자꾸 부르니까 괜찮은 것 같기도...?

남편 : 그럼 로아로 한다!

나 : (망설이다가) 오케이. 지금 바로 신청 ㄱㄱ

남편 : (단호하게) 출생신고는 내일 내가 동사무소 가서 할게. 내 손으로 직접 하고 싶어. 출발 전에 이름 다시 한번 확인하고.

나 : 좋아. 로아 아빠, 첫 미션.


위 내용은 실화를 기반으로 허구적으로 창작된 대화입니다.


씬2. 영유아 브랜드의 숲

육감의 교감으로 오감 따위는 초월해 버린 땅이 몽환의 숲 말고 또 있으니, 그건 영유아 브랜드의 숲이다. 임신과 육아의 숲을 지나온 내가 괜히 P에서 J로 변절한 것이 아니다.


오감만으로는 절대 선택할 수 없는 영역. '아이'와 관련되었다고 한다면 따질 것이 한두 개가 아니다. 유아용품 시장은 기능, 안전, 이미지로 무장해 엄마의 ‘좋은 부모’ 욕망을 자극한다. 뽀로로와 아기 상어, 곧 로아가 빠져들 것 같은 하츄핑까지. 뭐 종류가 134개라고요? 계속 늘어나고 있다고요? 귀여운 캐릭터의 탈을 쓰고 유혹하는 적들도 잘 살펴야 한다.


아기 옷과 장비는 이제 기능을 넘어 부모의 가치와 신분을 드러내는 상징적 소비가 되었다. 돈만 있다면 누구나 우리 아이에게 퍼스트 구찌를 선사하고 싶지 않을까.


https://www.youtube.com/shorts/zuJMcDijh0Y

드라마 <더글로리> 속 한 장면

돌잔치나 결혼식같이 특수한 경우에만 입는, 그런 예쁜 드레스들은 재질도 무척 불편한 것이 주제넘게도 가격은 10만 원을 훌쩍 넘는다. 1년에 한두 번 입을까 말까 한대도 말이다. 그렇게 큰맘 먹고 지출을 감수한대도 옷을 입히고 몇 분 지나면 아이는 어느새 머리띠는 홀라당 벗어던지고 옷을 벗고 싶다고 운다. 하지만 순간을 기억할 사진 몇 장을 위해서는 아이의 의사와 상관없이 꼭 그 옷을 입혀야 한다. 왜냐면 예쁘잖아.


블루독은 강아지, 에뜨와는 말, 왼쪽 가슴에 빨간색 B를 달고 다니면 누구나 베베드피노의 옷인 것을 안다. 천은 반의 반의 반이 들어가는데 왜 가격은 성인 옷하고 똑같은 거죠? 왜 태열에 좋다는 쁘리마쥬 태열 키트는 10만 원이 넘는 거죠? 왜 항상 예쁘고 좋은 것은 비쌀까.

아이는 줄어드는 데, 키즈 산업은 더욱 커지고 있다. 비싼 것엔 근거가 있고, 싼 것엔 용기가 필요하다. 아이에게 덜 좋은 것을 사 줄 용기. 문제는 ‘지나가버릴 시기’에 무엇을 살 것인가의 딜레마다. 그래서 많은 부모가 중고, 대여, 미니멀로 균형을 찾는다. 이제는 먹는 당근보다 핸드폰 속 당근에 더 손이 많이 간다. 당근은 원래 잘 안 먹었잖아!



씬3. 굿 끼니는 제때 먹어야지

출산 전의 나는 내 안위만 잘 챙기는 사람이었다.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눕고, 하기 싫으면 미루는 재주가 있었다. 지금이 몇 시인지도 모르고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스르르 사는, 좀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새롭게 투입된 터전은 달랐다. 아이는 해달라고만 하고, 나는 해줘야만 하는 자리. 아이의 규칙을 맞추는 사이 엄마의 시간은 물보다는 화르르 탔다가 금방 식는 불이 됐다.


아이가 자면 한 10분만 자야지. 1시 반까지만 밥 챙겨 먹을까? 한 5분만 청소기 돌릴까?


대학교를 다닐 때도 해본 적 없던, 불 같이 짧은 시간을 쪼개 쪼개 이어 붙이는 시간표 테트리스를 시작했다. 또또띠리리리또또....이럴 거면 타임 터너를 줘라.


내 시간도 포기하고 모든 촉각을 아이에게 곤두 세운 일방통행의 감정선은 가끔 현타를 몰고 왔지만 서운함은 또, 배냇웃음 한 번이면 금세 리셋됐다. 손가락으로 내 엄지를 꼭 잡아당기는 그 작은 힘에 대사는 다시 돌아온다. 그래, 로아야. 오늘도 끼니는 제때 먹었구나. 엄마는 못 먹었지만 그래도 괜찮아. 다이어트도 하고 좋지 뭘.


4. 시퀀스: 루틴의 붕괴

사실 난 밤샘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라떼는 막내 때 이틀에 3시간 잔 적도 있는데 말이야~ 그런데, 일하며 밤새는 것과 아이 보며 밤새는 건 달랐다. 전자는 플랜이 있고, 후자는 플랜을 무시한다. 전자는 집중으로 버티고, 후자는 반복으로 버틴다.


방송은 매일 다른 아이템이 던져졌지만, 육아는 <올드보이>의 만두 같은 거였다. 영화도 요즘은 요약본으로 중요 부분만 모아보는 세상에 하이라이트 구간이 없는 같은 화면의 반복이라.

루프 구조: 수유→트림→재우기→깸→다시 수유

눕히면 등센서가 켜지고, 안으면 졸음이 꺼지고, 토닥이면 잠결이 겨우 붙는다. 일할 때는 노트북 모니터를 들여다만 봤지, 노트북이 울지도, 우는 노트북을 달래서 재우지는 않았지 말입니다?


나: (전자레인지 앞) 1분 30초면 되겠지...?
엄마: 밥은 국물이랑 같이 먹어. 목 막혀.
나: (젓가락 들고 서서) 앉을 시간이 없어. 지금 자는 중이라...
엄마: 그럼 반만 앉아. 허리만 내려놔도 밥이 덜 서럽다.
나: (식탁 모서리에 걸터앉으며) 인정. 밥이 덜 서럽다.


위 내용은 허구입니다.


5. 주말 드라마: 처가로 출퇴근하는 사위

몇 없는 등장인물이지만 그나마 주말에는 새로운 얼굴이 등장했다. 그 메기는 남편이었다. 평일엔 회사에, 주말엔 처가에. 역할은 단 하나, 육아 교대.

토요일 오후, 엄마에게서 남편으로 바통이 넘어오면 나는 잠깐이라도 눕고, 남편은 아이와 시간을 보냈다.


"평일에도 일하는데 주말에도 고생이네"라고 내가 말을 건네면 메기는 "이게 바로 가장의 무게지!" 하며 답했다. 임산부 배려석도 마다하지 않았던 나. 감독의 무게를 나눠 가지는 남편의 참여도 굳이 마다하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 남편의 주말은 오로지 ‘아이’ 하나였다. 그래서 새로운 인물이 왔다 해서 장면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순해서 더 피로했고, 서로의 체력은 매번 조금씩 줄었다. 평일에는 서로 다른 시간을 이유로 지쳐있던 우리 둘. 주말에는 서로의 시간을 떠받치는 구조. 대단한 갈등도, 극적인 화해도 없었지만, 주말마다 반복되는 교대 컷이 우리를 겨우 다음 주로 밀어 올렸다.


남편 : 도착. 이제부터 내가 볼게.
나 : (눈 밑을 문지르며) 알겠어. 빨리 씻고 20분만 눈 붙일게.
남편: 로아야, 아빠랑 놀자.

(A Few Moments Later)
남편&로아 : zZZ

:....?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진 중 하나

남편이 돌아가는 일요일 오후면 다시 화면은 제자리로 돌아왔다. 잠시 대타 감독으로 특별 출연해 남편이 연출한 주말 드라마에 대한 나의 평가는 언제나 같다. “연출은 거칠지만, 생존은 확실하다.” 생존. 오늘도 잘 살아남았다면, 다음 주는 또 찍을 수 있다.


씬6. 저예산도 걸작이 된다: 오직 나에게만

비교는 조명을 망치고, 광고는 사운드를 과하게 키우고, 후기는 내 대사를 작게 만든다. 위축이 턱밑까지 차오르면 카메라를 한 걸음 물린다. 전경을 다시 잡는다. 오늘의 엔딩 크레딧을 흘린다. 오늘 수유는 네 번, 목욕, 울음 세 번, 웃음 네 번. 낮잠 두 칸, 분노 반 칸, 포옹 다섯 칸. 머리 냄새 맡기 열 번. 아이쇼핑은 수백 회.


관객의 박수는 없어도 괜찮다. 이건 내 영화다. 저예산 걸작의 유일한 조건은 ‘계속 찍는 것’. 감독도 관객도 나 혼자. (때때로 엄마, 남편과 교대) 등장인물도 내 맘대로 정한다. 오늘도 잘 살아남았으면, 나에게만큼은 이 영화는 참으로 걸작이다.


에필로그: 잠깐의 무대인사

머릿속에서만 편집하던 내 삶의 조각을 몇 컷 꺼내 보았다. 외할머니집에서 로아는 세 달을 꽉 채워 자랐고, 집으로 갈 준비를 마쳤다. 사실 육아는 영화라기보다 드라마에 가깝다. 매일 촬영하고, 가끔 결방도 하고, 그래도 다음 화는 온다. 다음 편도 계속 편집해서 꺼내놓겠다. 그게 어느 순간이든 엔딩 크레딧은 늘 같을 것 같긴 하다.

출연: 우리. 제작: 우리. 후원: 잠 그리고 밥.


다음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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