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 앞에서 잠이 들다
저번에, 일제강점기 시절 피서 문화에 대해 잠깐 언급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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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구리귀신은 방화죄로 '캄캄한 지옥' 같던 유치장에 갇혀 있는데, 아내 억척이는 내연남 쫄쫄이와 원산 해수욕장으로 떠난 대비를 보여드렸는데요. 1920년대 바다는 일제강점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요?
1920년대 들어 철도와 기선이 놓이면서, 바다는 경성 사람들에게 '새로운 여가 공간'으로 다가왔습니다. 경인선과 방파제 연결로 월미도는 ‘경성에서 제일 가까운 바다’가 되었고, 부산 송도는 유원주식회사가 시설을 깔면서 해수욕, 다이빙대, 요정, 호텔이 붙은 근대식 휴양지로 변했습니다. 신문은 해수욕 시즌을 알리고, 사진관은 해변 인증샷을 유행으로 만들었죠.
하지만 반짝이는 바다 이면에는 어두운 그림자도 있었습니다. 같은 바다는 누군가에게는 낭만, 다른 이에게는 생존의 전장이었거든요. 조선총독부의 어업 정책과 일본 자본 주도의 신식 어업이 어장을 장악했고, 조선 어민과 해녀는 면허, 세금, 단속의 그늘 아래 고된 노동을 이어가야 했습니다. 바다 한쪽에서는 요정과 호텔의 불빛이 반짝였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생존을 위한 고된 노동이 이어졌던 것이죠. 이렇게 낭만과 착취, 휴양과 노동이 공존하는 바다는 식민지 조선의 모순을 그대로 보여주는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바다는 양가적입니다. 도시인이 마음을 달래러 가는 피서의 장소이자, 식민지 경제의 착취가 가장 먼저 닿는 경계. 결국 1920년대의 바다는 위로와 현실 도피의 공간인 동시에, 식민지 조선의 냉혹한 현실을 마주하는 곳이기도 했는데요. 오늘 구리귀신이 찾은 바다는 과연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요?
(1) 마누라 덕분에 욕 보고(치욕을 당하고) 나서는 홧김에 바다에 나가서
구리귀신: 제가(=마누라가) 늙은 것이 그럴 (일이)야. 이 세상에 여자란 믿을 수가 있나. 화나는데 바닷바람이나 쐬다 가지.
해석: 경찰서에서 망신당한 뒤 바닷가로 간 구리귀신
경찰서에서 "요 코딱지만 한 놈"이라는 욕까지 들으며 쫓겨난 구리귀신. 아내 때문에 완전히 망신을 당한 거죠. 화가 잔뜩 난 구리귀신은 바닷가로 향합니다. "마누라가 늙은 주제에 바람을 피우다니!"라고 분노하면서 "세상에 여자는 믿을 수가 없어"라고 혼자 중얼거리는데요. 쫄쫄이와 바람을 피운 아내에 대한 분노가 가득한 모습입니다. 화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바닷바람을 쐬러 가고자 합니다.
(2) 철버덕거리는 물소리에 이내 슬픔을 하소연하니
구리귀신: 구리귀신이라는 별명까지 듣도록 돈 모은 것이 다- 쓸 데가 있느냐. 늘게 난봉이나 실컷 부리다 죽지.
해석: 바다 앞에서 신세 한탄하는 구리귀신
파도 소리를 들으며 앉아 있으니 감정이 북받쳐 올라옵니다. "구리귀신(구두쇠)이란 소리까지 들으면서 돈을 모아서 뭐 하나."는 자조 섞인 독백인데요. 평생 아끼고 모으며 산 인생인데, 막상 지금 이 꼴이니... 모든 게 허무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죠. 지금도 바다나 한강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자주 가는 곳이죠?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화날 때 바다가 마음을 달래주는 건 똑같나 봐요.
(3) 온종일 피로에 든 차 시원한 바람에 졸고야 말았을 때
구리귀신: 쿠루룩. 쿠-ㄹ 여 산홍이 술 한 잔 붓게. 고 손도 이쁘다.
해석: 피곤에 지쳐 잠든 구리귀신의 잠꼬대
하루 종일 원산까지 갔다가 경찰서 갔다가... 완전 녹초가 된 구리귀신이 바닷가에서 그만 잠이 들어버렸어요.
잠꼬대로 "산흥아(여자 이름인 듯 합니다), 술 한 잔 따라 봐"라고 중얼거리는 걸 보니 꿈속에서라도 현실을 잊고 싶었나 봐요. 자료가 없는 화에서 나왔던 사람일 것 같은데, 아무래도 기생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잠깐, 아내가 쫄쫄이랑 바람피웠다고 그렇게 분노하던 구리귀신이... 본인도 산흥이라는 여자와 관계가 있었나 봅니다. 아내 불륜에는 그렇게 화내면서 정작 본인도 비슷했다니, 도긴개긴이네요. 파도 소리 들으며 잠든 모습이 참 쓸쓸해 보입니다.
(4) 밀려온 조수는 꿈속에 산흥과 구리귀신을 얼싸안고야 말았다
구리귀신: 어이구 저 가방 속에 돈...... 이거 다- 억척의 덕이야. 어- 꿈에 본 산흥이.
해석: 밀물에 놀라 깨는 구리귀신
잠든 사이 밀물이 들어오기 시작한 밀물. 차가운 바닷물에 구리귀신이 놀라 깼는데요. 첫마디가 "어이구, 가방 속 돈!" 역시 구두쇠는 물에 빠질 뻔한 상황에서도 돈부터 걱정하네요. 자신의 실수도 "이것도 다 억척(아내) 덕이야"라며 아내를 탓을 하고요. 꿈에서 본 산홍이를 아쉬워하는 걸 보니... 현실은 차가운 바닷물, 꿈은 따뜻한 술자리였던 모양입니다.
이번 에피소드를 보면서, 1920년대 바다의 두 얼굴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누군가에게는 낭만적인 휴양지였지만, 구리귀신에게는 현실의 고통을 잠시 잊게 해주는 도피처였죠.
분노와 허무함, 그리고 아내에 대한 원망까지. 복잡한 감정을 안고 찾아간 바다에서 그는 결국 잠이 들었고, 차가운 밀물에 의해 다시 현실로 돌아옵니다. 위로를 주는 듯했던 바다가 결국은 냉정한 현실을 깨닫게 해 준 셈이에요.
결국 바다는 아무 말 없이 모든 것을 받아줄 뿐, 문제의 해결은 다시 현실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구리귀신은 과연 이 현실을 어떻게 마주하게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