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만화방] 구리귀신(12) 기차계급표

구리귀신이 기차에서 쫓겨난 이유

by 심야초

새로운 시대의 상징이자 차별의 공간, 철도

1906년 안양역에 정차한 경부선 기차를 촬영한 사진

1899년 9월 18일, 경인선 철도 개통과 함께 조선 땅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기차. 당시 사람들에게 기차는 놀라운 속도의 문명이었습니다. 일본의 철도창가의 멜로디와 가사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최남선의 '경부 철도가'에는 "날개 가진 새라도 못 따르겠네"라며 기차의 위력을 찬양하는 가사가 담기기도 했는데요. 기차는 단순한 교통수단을 넘어 시대의 전환을 알리는 상징이었습니다. 신분, 나이, 성별을 가리지 않고 승차권만 있으면 누구나 탈 수 있다는 점에서 평등의 공간처럼 보였거든요. 하지만 실제로는 어땠을까요?


기차 안에는 새로운 차별이 존재했습니다. 바로 경제력에 따른 차별이었죠. 사회적 지위와 재산에 따라 객차는 1등 칸, 2등 칸, 3등 칸으로 나뉘었고, 요금에 따라 이용 시설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양복을 입은' 일본인이나 하이칼라들은 1등실이나 2등실을 차지했고,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3등 칸에 몰려있었는데요. 이광수는 <나의 고백>에서 이런 장면을 생생하게 증언했습니다.


"부산역에서 차를 타려 할 때에 역원이 나를 보고 그 차에 타지 말고 저 찻간에 오르라고 하기로 그 연유를 물었더니 그 찻간은 조선인이 타는 칸이니 양복 입은 나는 일본 사람 타는 데로 가라는 것이었다. 나는 전신의 피가 거꾸로 흐르는 분격을 느꼈다."


조선인들은 기차에 타는 순간부터 화물처럼 취급당했습니다. 소춘(小春)의 <그것이 제일이더라>라는 글에서는 돈도 없고 권력도 없는 조선의 늙은 부인이 일본인 어린아이에게 내쫓기는 모습이 그려지기도 했습니다.

철도 요금도 교묘하게 차별적이었습니다. 1908년에는 근거리 요금을 대폭 인상했는데, 당시 근거리 여행객은 대부분 조선인이었고 일본인 승객은 대부분 장거리를 여행했기 때문에, 요금 혜택을 보는 건 거의 일본인들이었죠.


기차 안의 또 다른 주인공, 차장

기차 안에서 승객들을 통제하고 표를 검사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차장입니다. 차장은 열차 운행 중 안전관리와 질서유지를 담당하는 중요한 직책이었는데요. 표를 검사하고, 승객의 탑승 위치를 안내하고, 때로는 규정을 어긴 승객을 내쫓는 권한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기차 안에서 검표하는 승무원

소춘의 글을 보면 차장이 조선인 승객의 표를 보고 한참 동안 얼굴을 쳐다보는 장면도 나옵니다. "네가 어떻게 이 표를 가졌느냐"는 듯한 눈빛이었죠. 조선인이 1등이나 2등 표를 들고 있으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봤고, 3등 표를 가진 조선인이 1등 칸에 앉아있으면 가차 없이 쫓아냈습니다.

내가 내여 주는 차표를 보고는 이상하게도 한참이나 나의 얼굴을 쳐다본다. 마치 네가 엇더케 ‘이 표를 가젓느냐’ 하는 듯 십헛다. 그러나 표가 표이라 “저리 가-” 하는 말은 없었다. 나는 그 순간에 앗가 쪼기여 가든 그 부인네 생각이 낫섰다. 아아 쪼끼여 가는 삼등객, 쫓기어 가는 무산객, 뷔인 간, 뷔인 자리가 여기에 있는데 그대의 가는 곳이 어대었넌고.

1920년대 기차 차장은 대부분 일본인이거나 일본에 협력하는 조선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일본 제국의 질서를 기차 안에서 유지하는 역할을 했고, 조선인 승객을 통제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죠.


칸마다 다른 세상

기차의 등급은 승객의 사회적 지위를 그대로 보여주는 거울이었습니다.

1등 칸은 넓고 쾌적한 좌석, 깨끗한 화장실, 식당차 이용권까지 포함된 최상급 공간이었습니다. 주로 일본인 고관, 부유한 상인, 조선 내 친일 인사들이 이용했죠. 부산과 중국 펑텐 간을 운행하던 급행열차에는 식당차까지 딸려있었는데, 흰 테이블보가 깔린 식당에서 양식을 즐기는 모습은 그야말로 특권층의 상징이었습니다.

2등 칸은 1등보다는 덜하지만 그래도 나름 괜찮은 시설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일본인 중산층이나 조선의 양반 출신, 신식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 주로 이용했습니다.

3등 칸은 완전히 다른 세계였습니다. 좁고 답답한 좌석, 사람들로 가득 찬 공간, 담뱃재와 침을 뱉는 사람들, 때 묻은 흰옷을 입은 동포들... 이광수는 3등 칸에 대해 때 묻은 흰옷을 입은 동포들과 고약한 냄새가 나는 공간이라고 묘사했습니다. 환기도 제대로 되지 않아 창문을 꽁꽁 닫은 3월의 기차 안은 숨 쉬기조차 힘들었죠.


나는 “나도 조선인이오.” 하고 조선인 타는 칸에 올랐다. 때는 3월이라 아직도 날이 추워서 창을 꼭꼭 닫는 찻간에서는 냄새가 났다. 때 묻은 흰옷을 입은 동포들이었다. 그때에는 머리 깎은 사람도 시골서는 흔치 아니하였고 무색옷을 입은 사람은 더구나 없었다. 실로 냄새는 고약하였다. 그리고 담뱃재를 버리고, 자리싸움을 하고, 침을 뱉고 참으로 울고 싶었다. 나는 이 동포들을 다 이렇지 아니하도록, 그리고 모두 깨끗하고 점잖게 되도록 가르치는 것이 내 책임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고는 내가 할 수 있는 대로는 말로 몸으로 그들을 도우려고 애를 썼다.

여기에 더해, 곡간차(화물칸)에 사람을 태우는 일도 있었습니다. 표를 살 돈이 없거나, 3등 칸마저 만석일 때 조선인들은 화물칸에 실려 이동했습니다. 말 그대로 짐짝 취급을 받은 거죠. 1970년대까지도 초등학교 수학여행을 화물차에 실어 보내 문제가 된 적이 있을 정도니, 1920년대에는 오죽했을까요.


철도, 수탈의 도구

일제가 한반도에 철도를 깔은 이유는 명확했습니다. 군사적 목적과 경제적 수탈이었죠. 경인선, 경부선, 경의선은 모두 군대의 신속한 이동을 위해 건설되었고, 1914년 호남선과 경원선이 부설되면서 호남의 곡창지대와 북부의 광공업 지대가 일제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화물 수송량을 보면 철도가 얼마나 노골적인 수탈의 도구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1907년 39만 1000톤이었던 화물 수송량이 1919년에는 364만 3000톤으로, 10년 사이에 약 10배나 늘어났습니다. 그 화물의 대부분은 조선에서 수탈한 쌀과 자원이었죠.

1920년부터 시행된 '조선산미증식계획'으로 조선의 쌀은 대량으로 일본으로 실려갔습니다. 쌀 생산량은 1920년 1270만 석에서 1928년 1730만 석으로 36.2% 증가했지만, 일본으로 수탈된 미곡은 같은 기간 185만 석에서 742만 석으로 무려 301.1%나 증가했습니다. 그 결과 조선인의 국내 쌀 소비량은 오히려 10%나 감소했죠.

철도는 일본 상품을 조선에 판매하고, 조선의 식량과 자원을 일본으로 실어 나르는 대동맥이었습니다. 조선의 간선 철도는 원래부터 각 지역 간의 물자 유통보다는 일본·조선·만주 사이의 병참 및 상품 수송을 목적으로 부설되었고, 이런 목적을 띤 간선 철도가 모든 국유 철도 총연장의 80%를 차지했습니다.


이번 화에는 이런 기차가 등장하는데요. 다시 구리귀신의 이야기로 돌아가볼까요?


1925년 7월 12일, 원문으로 만나는 구리귀신

구리귀신 (12) 부부생활《시대일보》1925.07.12

구리귀신(12) 부부생활


(1) 밤새도록 헤매다 나온 안팎 물투성이의 구리귀신은

구리귀신: 이것 내가 무슨 고생이야. 엥 그 빌어먹을 억척 때문에... 백 년을 갇히거나, 천 년을 갇히거나 뉘 아니.


해석: 밤새 헤매던 바다에서 벗어난 구리귀신

바다에서 밤새 헤매던 구리귀신이 온몸이 물투성이가 된 채로 겨우 바다에서 벗어났습니다. "백 년을 갇히거나, 천 년을 갇히거나"라는 말에서 모든 게 아내 억척 때문이라며 원망하는 마음과 이제 아내의 석방에 대한 기대를 저버린 구리귀신의 모습이 보이네요.


(2) 삼등표를 사고 꼴에 일등을 잡수러 차에 올랐다

구리귀신: (기차에 오르는 모습)


해석: 삼등표로 일등칸에 오른 구리귀신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구리귀신. 구두쇠 구리귀신답게 삼등표를 샀습니다. 하지만 일등칸으로 올라갔죠. 아마도 '어차피 같은 기차인데 뭐가 다르냐'는 생각이었을 겁니다. 혹은 물에 젖은 몸을 따뜻하게 녹이고 싶었을 수도 있고요. 하지만 이건 큰 실수였습니다.


(3) 차 속에 사람들은 내쫓으라 호령이 빗발치듯 할 때

차장: 아-니, 저게 웬 걸레야.

승객2 : 여보! 차장. 저걸 어딜 들여!!


해석: 일등칸 승객들의 반응

물투성이에 초라한 차림의 구리귀신이 일등칸에 들어서자 승객들의 반응은 즉각적이었습니다. "저게 웬 걸레야"라는 말에서 구리귀신에 대한 멸시가 그대로 드러나죠. "차장, 저걸 어딜 들여!!"라며 당장 내쫓으라고 호령합니다. 일등칸 승객들은 대부분 일본인이었을 것이고, 물에 젖은 조선인 영감이 자신들의 공간에 들어온 것을 참을 수 없었던 겁니다.


(4) 차장의 눈에 들켜 차장의 발길에 곡간차 신세를 지게 되었다

차장: 요 놈. 저 꼴에도 삼등표로 일등을 들어가? 요 물에 빠진 생쥐 같은 놈아!


해석: 차장에게 쫓겨나는 구리귀신

결국 차장이 나섰습니다. 차장은 구리귀신이 삼등표인 것을 확인하고는 "요 놈! 저 꼴에도 삼등표로 일등을 들어가?"라며 호통을 칩니다. "물에 빠진 생쥐 같은 놈"이라는 말은 완전한 멸시의 표현이죠. 그리고 구리귀신은 3등 칸도 아닌 곡간차(화물칸)로 쫓겨났습니다. 이건 단순히 등급을 어긴 것에 대한 처벌이 아니라, 사람이 아닌 짐 취급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차장의 발길에 차여 화물칸으로 내던져진 구리귀신... 그야말로 굴욕적인 순간이네요.


기차가 보여준 식민지 조선의 현실

구리귀신의 이 짧은 에피소드는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이 일상에서 겪었던 차별과 모욕을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기차는 근대 문명의 상징이었지만, 동시에 식민 지배의 도구이기도 했습니다. 속도와 정확성이라는 근대적 가치를 전파했지만, 그 안에서는 일본인과 조선인, 부자와 가난한 자를 철저히 구분했죠.

삼등표로 일등칸에 올랐다가 화물칸으로 쫓겨난 구리귀신. 그는 단지 표를 잘못 산 게 아니라, 자신의 위치를 망각한 대가를 치른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KTX를 타든 무궁화호를 타든, 표만 있으면 누구나 동등하게 대우받습니다.(다만, 지금도 자본주의의 논리가 존재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100년 전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같은 돈을 내고도, 아니 어떤 경우엔 돈을 내고도 화물칸에 실려야 했습니다.


화물칸에 앉아 집으로 다시 돌아가는 동안, 구리귀신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내에 대한 원망? 자신의 처지에 대한 한탄? 아니면 이 모든 상황에 대한 분노일지도 모르겠네요.


철도 부설을 통한 식민 지배의 강화

[한국철도 130년] ②민족의 애환과 함께 달려온 철도 [일제강점기]

일제가 조선에 철도를 놓은 이유는?

웹진 '역사랑' 2024년 4월(통권 50호)

“한국 철도는 일제의 침탈 통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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