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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니슨 Mar 25. 2022

엄마의 저주

다이아몬드가 되자


“딱 너 같은 애 낳아봐라!”

어릴 적 엄마에게 들은 말 중 요즘 부쩍 생각나는 말이다. ‘딱 너 같은 애’. 당시 나는 그게 무슨 대수냐며 ‘흥’ 콧방귀를 뀌었을 것이다. 뭐 하나 잘난 것도 없는 주제에. 그게 중2병 때문이었는지, 단순히 엄마에 대한 반항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또 나의 어떤 점이 엄마의 속에서 그 말을 끄집어냈는지도 모르겠다. 뿌연 안갯속 반대편에서 비추는 헤드라이트처럼 그 말만이 선명할 뿐이다. 


그땐 별것 아니라고 무시하고 넘겼던 그 말은 진정 무시무시한 저주였다. 내가 지금 딱 ‘나 같은 애’를 키우느라 죽을 똥 싸고 있으니 말이다. 그것도 둘이나!


분명 내 속으로 낳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고전적인 표현을 수 천, 수만 번 반복해도 틀리지 않은 아이들인데 대체 이 아이들은 무엇 때문에 하루 종일 내 속을 태운단 말인가! 애가 이러저러해서, 나한테 자꾸 이러저러하니까.. 줄줄이 이유를 나열하기도 힘들다. 분명한 것은 과거 내가 그렸던 ‘우아한 육아’ 따윈 길바닥에 집어 던지기라도 했는지, 지금의 나는 육아가 미. 치. 겠. 다.는 것이다! 이 와중에 더 미치겠는 건 아이에게서 어릴 적 내 모습이 보인다는 것.

엄마의 저주 ⓒ픽사베이


자업자득, 인과응보, 또 어떤 표현이 좋을까.. 아이들에게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면서도 내가 엄마에게 똑같이 했을 모습이 떠올라 낯짝이 붉어진다. 훈육이라는 명분을 갖다 붙이며 화를 내고 있는 것도 부끄럽기 짝이 없는데 내가 화가 나는 대상이 바로 어릴 적 내 모습을 한 아이들이라니. ‘미치고 팔짝 뛸’이라는 표현은 바로 이런 데 붙는 수식일 것이다. 




그날도 제대로 저주를 받아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아이들도 나도 서로의 감정에 무척이나 지쳐 있었다. 점심에 라면을 끓였다. 화가 나도 아이들은 먹여야겠기에 먼저 먹이고 나서야 내 것을 끓여 식탁에 앉았다. 그리고 그 옆에 허옇게 서리가 맺힌 소주 한 병을 꺼내왔다. 


뒤늦게 깨달은 엄마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소주가 내 감성을 끄집어낸 때문인지, 아이의 행동에 대한 실망 때문인지 한참이나 눈물이 흘렀다. 아마도 아이에 대한 미안함이 90프로 이상이었을 것이다. ‘난 왜 이것밖에 안 되는 엄마일까.’ 또다시 반성의 시간이 시작됐다. 다 불어 터진 라면에 주름진 엄마의 얼굴과 아이들의 웃는 얼굴이 교차돼 보이는 탓에 결국 젓가락을 내려놓고 말았다. 눈물을 들키지 않으려 끅끅 소리가 나도록 애써 눌렀다. 




2월의 어느 날, 오랜만에 엄마를 만났다. 코로나 이후 엄마를 만나는 것조차 조심스러워 피하다 정말 오랜만에, 자가검진키트 음성을 확인한 후에야 만남이 성사됐다. 눈썰매를 탔다. 엄마는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몇 번 타고 지친 나와 달리 엄마는 우사인 볼트와 대결이라도 하려는 듯 날아다녔다. 


나보다 키도, 덩치도 작은 엄마. 신나서 다니는 엄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우리 엄만 나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어서 갑자기 눈앞이 먹먹해졌다. 누가 볼세라 팔뚝을 들어 올려 쓱쓱 닦아냈다. 

실컷, 아니 엄마에겐 아쉬움이 남은 눈놀이 후 저녁을 먹으며 얘기했다. 


“엄마. 옛날에 엄마가 ‘너 같은 애 낳아봐라.’ 했잖아~. 그 저주 제대로 먹혔어. 엄마 딸 요즘 아주 죽을 맛이야.”


엄마는 한참을 웃다가 “이제 알았냐!”했다. 애들 원래 다 그렇게 큰다면서. 


“나 요즘 얘네 키우면서 진짜 반성 많이 해~.” 엄마는 또 웃더니 내 어릴 적 얘기를 털어놓으려 시동을 걸었다. “안 돼! 하지 마! 여기 사위랑 손자 손녀 다 있는데 그런 얘기 하면 안 되지~. 내 얘긴 좋은 것만 해줘~”. 나오려던 이야기 보따리의 길목을 두 팔로 막아섰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게 그냥 둘 수는 없었다. 

엄마는 어이없어하며 또 웃었다. 그 모습이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였다. 


엄마도 나처럼 도망가고 싶은 때가 있었겠지. 엄마도 나처럼 내가 꼴 보기도 싫은 만큼 미운 때가 있었겠지. 그럼에도 엄마도 나처럼 내가 너무 예뻐서 죽겠는 날도 있었겠지. 나를 낳은 게 참 고맙다고 생각하는 날이 있었겠지. 가만히 엄마의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세상의 온기를 모두 품은 듯한 이 따스함을 그때도 알았다면 좋았을 것을. “됐고! 그러면 이제라도 잘 해!”라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싶다.

엄마의 저주 ⓒ픽사베이


어쩌면 엄마로 사는 것은 무수히 작은 기쁨과 슬픔과 반성들이 모여 결정을 이루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만들어내고 있는 이 결정이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하고 아름답게 빛날 수 있도록, 오늘은 나를 쏙 빼다 박은 두 아이와 또 지지고 볶을 내일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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