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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의 안 매운 매운 만두

세월 앞에서 이렇게 무력할 수 있나

by 이니슨

세월 앞에 장사 없다더니, 시어머니도 참 많이 연세가 드셨구나...



"만두 했으니 가져가라."

아이들 등교 준비로 바쁘던 아침. 시어머니의 전화로 더욱 분주해졌다. 등교 후 계획한 일이 없지 않았으나 냉장고에 들어갈 자리가 없다는 시어머니의 다급함은 쉽게 'No!' 할 수 없게 했다. 남편이 시어머니의 만두가 먹고 싶다고 했다 한다. 절인 고추가 든, 매운 만두를.




결혼 전 친정에서 내 만두 빚기 경력은 10년 이상이었다. 나름 예쁘게 잘 빚는다고 자부하던 나였다. 그런데 결혼 후 나는 만두 빚기 초보 중에서도 왕초보에 불과했다. 두 집안의 만두 모양이 다르기 때문인데 친정은 끝을 하나로 모아 둥글게 만드는 이북식이었고, 시가는 어느 지역의 방식인지는 모르겠지만 반달 모양이었다. 만두소를 꽉꽉 채워 넣으면 터지고, 적게 넣어도 모양을 잡기 힘든, 내 딴에는 만들기 굉장히 버거운 형태였다.

ⓒ픽사베이


나보다 더 긴 경력의 전문가인 시어머니는 속이 빵빵하고 반달 모양이 곱게 만두를 빚으셨다. 특히 아들이 좋아한다며(다른 이유가 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절인 매운 고추를 잔뜩 넣어 만드시곤 했는데 매운 것을 잘 먹지 못하는 내겐 넘기 힘든 벽처럼 매웠던 기억이 강하게 남아 있다.


남편은 그 만두가 먹고 싶었을 것이다.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나와 남편보다 더)이기에 만두를 요청(?)한 모양이었다. 시어머니는 아들을 위한 매운 만두, 며느리를 위한 덜 매운 만두, 손자손녀를 위한 안 매운 만두를 빚으셨다. 쉬엄쉬엄 하셨다지만 꽤 많은 양이었다.


"어머님, 만두 되게 맛있어 보여요~."

눈앞에 보이는 삶은 만두 하나를 베어 물었다. 남편용 매운 만두였다. 그런데 어랏??? 하나도 맵지 않았다. 끝 맛이 조금 매웠지만 예전과 같은 맛이 아니었다.


"어? 어머님. 이거 안 매운데요?"

"어머 그러니? 간 보고 많이 맵게 만든 건데~"


예전이나 지금이나 나는 여전히 매운맛에 익숙지 않다. 예전의 매운맛이었다면 내 혀가 반응하지 않을 리 없다. 옆의 것을 또 하나 집어 먹었으나 맵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순간 마음이 이상했다. 나이가 들면서 음식의 간을 잘 보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다. 만두를 맛보는데 문득 그 말이 생각나는 것이다. '어머님도 이렇게 연세가 드셨구나. 그렇게 음식 잘하시던 분인데.'




시어머니는 성격이 굉장하셨다. 원래가 그러신지, 아들 둔 기세였는지는 몰라도 과거 상견례 이후 친정 아빠가 "시어머니 기가 너무 세시다. 고생 꽤 하겠구나." 하실 정도였다. 아니나 다를까 시어머니의 꼬장꼬장함은 내 목을 조이는 듯했다. 변명 같아도, 그 시기부터 내 우울함이 시작됐다.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시집살이,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을 강요하는 시집살이, 하루에도 수차례 전화가 오는 시집살이, 우리의 휴일이 우리의 휴일이 아닌 시집살이, 수시로 부르시는 시집살이, 시어머니보다 더 한 (결혼한)두 시누이가 늘 함께 하는 시집살이, 친정과는 정 끊어야 하니 자주 연락하지 말라는 시집살이, 일부러 내 일거수일투족을 쌍심지 켠 눈으로 감시하는 듯한 시집살이, '너네만 잘 살아라'하시더니 '너네랑 우리 다 같이 잘 살자'였던 시집살이. 글로 쓰려면 손이 아플 정도의 시집살이였는데 시어머니는 어느새 그때의 시어머니가 아니었다. 이젠 과거의 꼬장꼬장함은 많이 줄었고, 아들 가진 위세보다 며느리 잘 들어왔다며 칭찬해 주시는 시어머니다. 물론 가까운 거리에 살기에 여러 가지로 애로사항이 많지만 어찌 됐든 시어머니는 더 이상 과거의 그 시어머니가 아니다.


ⓒ픽사베이


그 와중에 시어머니의 음식 맛이 변한 것은 꽤 큰 충격이었다. 과거의 시집살이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답답하지만 맛이 변한 만두를 먹으며 느껴지는 세월의 야속함이라니... 십여년의 시간 동안 시어머니의 성미는 예전과 달라졌고, 동시에 이렇게 음식의 간도 많이 달라졌다니. . 참 묘한 마음이었다. 어른에게 이런 표현을 써도 될지 모르겠지만 '짠함'과 같은 마음이랄까. 게다가 당뇨와 합병증으로 수시로 병원 문을 두드려야 하는 시어머니를 보며 시집살이로 인한 불만보다 애잔함이 더 진하게 느껴지곤 하던 참이었다.



ⓒ픽사베이


시어머니의 안 매운 매운 만두. 그것은 아직 우리 집 냉동실 한 칸을 차지하고 있다.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마법 같은 만두다. 그 만두를 볼 때마다 시어머니를 향한 '짠함'이 밀려든다. 세월 앞에 무력해지는 인생의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계실 때 잘해야 한다는 어르신들의 말씀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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