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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니슨 Jun 12. 2023

어쩌면, 살아있는 지옥

아이의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대체 머리에 뭐가 들었길래 저러나.


또 그 생각이다. 아이를 보며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정말이지 미치겠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생각이 드는 통에 몸서리가 쳐진다.


Image by Hjörleifur Sveinbjörnsson from Pixabay


초등학교 고학년 아들. 최근 들어 아이와 실랑이가 잦아졌는데, 문제의 발상지는 대부분 '공부'다. 공부를 시키려는 엄마와 하지 않으려는 아이 사이에선 늘 불꽃이 튄다. 게다가 사춘기의 기운이 스멀스멀 풍기는 아이가 눈을 치켜뜬 험상궂은 얼굴로 목소리의 끝을 한껏 높여 말하는 통에 엄마의 속은 더 뒤집어진다.

"화내지 말고 말로 하면 어떨까?"
"나 지금 화 안 내고 있거든요?!?!"

엄마의 제안을 아이는 가볍게 타 넘는다.

"그래? 그렇다면 엄마는 지금 너와 말하고 싶지 않으니까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지금 말하고 싶다고요!"
"나는 나한테 함부로 대하는 사람하고는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아."
"아아악~. 난 지금 말해야 한다고!!"

엄마는 어쩌면 세계에서 '참을 인'자를 가장 많이 쓰며 사는 종족이 아닐까. 자신이 마치 활화산이라도 되는 듯 하기 싫다는 분노를 분출시키는 아이 앞에서 엄마는 참을 인을 새기고 또 새긴다. 엄마의 마음은 이미 참을 인자 모양 자체가 된 지 오래지만 다시 그 모양을 다듬기라도 하려는 듯 새기고 새기고 또 새기고를 반복한다. 엄마가 참을 인을 새기는 사이 아이의 화산은 더욱 강렬히 폭발한다. 그러다 쾅! 천지를 울릴 듯한 천둥이 비바람을 몰고 와 세게 뿌린다. 노아의 방주까지 물보라에 가둘 듯 세차게 내린다. 그제야 아이의 화산은 분출을 멈춘다.

"이따가 다시 얘기하자고 했잖아!!"
"........"
"엄마가 여러 번 기회를 줬잖아!! 너는 내가 참고 있으면 어떻게든 이겨먹고 싶은 거야? 그런데 어쩌지? 네가 나를 이겨먹으려고 올라타면 나는 어떻게든 너를 떨어뜨리고 말 텐데?!?!"

분명 다툼의 원인은 '공부'였는데 감정싸움으로 변질되고 만다. 매번 이런 식이다. 사소한, 생각해 보면 정말 별 것도 아닌 문제를 놓고 실랑이가 시작되면 곧잘 감정싸움으로 이어져 강자가 약자의 멘탈을 바닥으로 끄집어 내리고서야 종료된다. 강자도 약자도 얻은 것 하나 없는 가슴 저린 다툼은 리플레이되며 일상을 휘젓는다.

지긋지긋한 그 공부는 대체 왜 해야 할까. 내 어릴 적을 돌아본다. 나는 왜 공부를 해야 했을까? 당시의 나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해야 한다니까 억지로 했을 게 뻔하다. 지기 싫어서 이를 악물고 했겠지만 결국 오르지 못할 벽 앞에서 수차례 무릎을 꿇었겠지. 이제와 생각해 보면 그 벽을 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을 것이다. 공부만이 벽을 넘는 사다리는 아니었을 텐데 왜 그렇게 공부에만 목을 맸어야 했을까.

알면서도 내 아이 앞에서 나는 몇 십 년 전의 어른들과 같은 말을 반복한다.

"네가 공부를 안 하면 뭘 할 건데!"
"우리나라에서 대학이 얼마나 중요한 줄 알아?"
"다 너 위해서 이러는 거 아니야!"

불확실한 미래를 향한 두려움이라는 기본 옵션에 아이를 위한다는 명목을 얹으 할 말 없게 만드는, 엄마의 주특기다. 월수금 영어, 화목 수학. 더군다나 선행도 아니고 교과 과정 따라가는 수준이다. 초등학교 고학년에 이 정도는 적게 공부하는 것 아닌가,라는 엄마 기준에서의 비교급을 강조하며 아이를 내몬다.

그런데, 정말 모르겠다.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건가. 그렇게 스트레스받는데 밀어붙이기만 하는 게 맞는 건가. 모든 게 다 엄마의 욕심 때문은 아닐까. 지금의 내가 미래의 아이를 망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지금의 삶이 살아있는 지옥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이도 나도 스트레스다.

"애도 크면 엄마의 마음을 알게 될 거야."

라는 위로의 말에 반박하고 싶다. "아니요. 몰랐으면 좋겠어요. 내 아이는 어른이 돼서도, 부모가 돼서도 이런 마음은 몰랐으면 좋겠어요."

Image by lil_foot_ from Pixabay


아이와의 관계가 공부라는 매개로 엉망이 되고, 또 그게 아이에게 감당하기 힘든 스트레스인 게 마음이 아파 물었다.


"우리 그냥 다 그만두고 좀 쉴까?"


아이는 선뜻 답을 하지 못한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 기회는 없을 것 같아. 중학교 들어가면 정말 다시는 이렇게는 안 될 것 같아서 그래. 학원 다 끊고 놀만큼 놀아봐. 그러다가 네가 정말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그때 얘기해. 그럼 엄마도 기쁜 마음으로 너에게 맞는 학원을 다시 알아볼게."


"싫어. 그럼 친구들이 공부 못한다고 놀린단 말이야."


"어쩔 수 없지. 그건 네가 감당해야 할 몫이야. 학원에 다닌다고 다 공부를 잘하는 건 아니잖아? 하고 싶을 때 예습 복습 정도 하면 되지. 그리고 공부가 네 인생의 전부는 아니야. 가장 중요한 건 그냥 너지."


아이는 여전히 답이 없다. 오랜 고민 끝에 아이와 나는 다시 한번 해보기로 했다. "공부해!" 대신 "공부하자~"라며 내 선에서의 도움을 주기로 했다.

당장 오늘 영어학원에서 단어평가가 있다. 아이는 단어 외우는 요령을 아직 익히지 못해 힘들어한다. 그런 아이를 붙잡고 나는 또 공부를 시켜야 한다.


이게 맞는 건가. 정말 맞는 건가. 신에게라도 묻고 싶다. 정말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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