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시작됐다.
너와 나의 전쟁이.
공부를 더 하라는 나의 바람과
쉬고 싶다는 너의 발악은
물과 기름처럼
도무지 섞일 틈이 없다.
"곧 시험"이라는 나와
"아직 남았다"는 너는
시곗바늘처럼 다른 속도를 고집한다.
나는 거짓말쟁이일까.
'건강하게만 커다오'
바라던 내가 불쑥 고개를 든다.
열이 펄펄 끓는 네 머리를 짚으며,
숨이 넘어갈 듯 기침을 하는 너를 끌어안으며
나는 세상 모든 신에게
간절히 기도하곤 했었지.
거칠게 휘갈기는 펜 소리는
나를 다시 현재로 불러와
금기어의 봉인을 풀어버린다.
자정이 다 돼서야
별똥별처럼 붉은 채점 자국이 남은
문제집을 덮는다.
너와 내 마음에도 진한 상처가 새겨졌지만,
오늘 밤 너의 잠은 부디
편안하고 포근하기를.
모순 덩어리인 이 엄마는
또 염치없이 세상의 모든 신께 빌어본다.
[ 엄마의 새빨간 거짓말에도 서사는 있다 ]
"그렇게 하기 싫으면 다 그만두고 다른 인생 계획을 세워 와!"
오늘도 아이한테 소리를 질러대고 말았다. 공부를 멀리 하려는 아이와 어떻게든 가까이 붙여 놓으려는 나 사이에서 또 불꽃이 솟아난다.
'도대체 언제 정신을 차리는 거야!'
2주 뒤가 중간고사인데 아직 천하태평으로 보이는 아이 앞에서 나는 매번 망연자실한다.
중2의 1학기 중간고사.
아이와 부모가 공부를 포기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짓게 되는 중요한 시험이라고들 한다. 게다가 내가 사는 곳은 고등학교 비평준화 지역이기에 2학년부터의 성적은 고등학교 진학을 결정짓는 주요 요소로 작용한다. 벌써부터 공부에 집착해야 하는 게 안타깝지만 나로서는 조급할 수밖에 없다.
아이는 사교육이라고는 영어 학원밖에 다니지 않는다. 게다가 1학년 첫 시험 때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봐.'라며 두고 봤더니 참담한 성적표 앞에서 말문이 막히는 경험을 한 터였다.
"이번 시험부터는 엄마랑 계획 짜서 같이 해보자"라며 의기투합한 게 겨우 일주일 전이다.
나라고 쉬고 싶은 마음이 없겠는가. 아침엔 주방으로 출근했다가 다시 회사로 출근하고, 회사 퇴근 후에는 다시 집으로 출근해서 온갖 집안일을 다 해야 하는 내게 아이 공부 봐주기라는 새로운 임무가 주어졌다. 그뿐인가. 야근 수당이나 특근 수당은 바랄 것도 아니고, 온갖 짜증이 묻어 있는 얼굴과 원망 섞인 말이 반사되듯이 튀어나오니 지옥도 이런 지옥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다.
어르고 달래고 화도 냈다가 다시 어르고 달래고. 미친 사람처럼 오락가락하면서도 "나도 피곤하다고!"라는 아이 앞에선 배가 잔뜩 곯아 사나워진 맹수가 되고 만다.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저녁에, 아이의 미래라는 거대한 짐까지 짊어지려니 결국 과부하가 걸리고 마는 것이다.
"니 공부지 내 공부야? 그럴 거면 다 그만두고 나가서 돈이나 벌어 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쏟아내는 나라고 마음이 편할까. 참고 참던 모진 말을 내던지면서도 가슴이 아픈 게 엄마 아니던가.
"다른 건 바라는 거 없고요. 건강하게만 자랐으면 좋겠어요."
아이의 돌잔치 때 '아이가 뭐가 됐으면 좋겠냐'는 사회자의 질문에 그렇게 답했었다. 그게 진심이었다.
열이 펄펄 끓어 울 힘조차 없는 아이의 손등에 링거 바늘을 찔러 넣으면서도 기도했다. '제발 빨리 낫게 해 주세요.' 그때 내 세계의 신은 오직 아이의 해열과 완치에만 응답하면 그만이었다.
아이가 문제집을 거칠게 넘기는 소리가 바람을 가른다. 소환됐던 과거의 간절함 위로 날카로워진 마음이 덮인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대치 이후, 표면상으로는 내가 우위를 선점한 것 같지만 아니다. 매번 지는 쪽은 나다.
아이는 자정이 가까워진 시간에야 그날 약속했던 공부를 마쳤다. 피곤에 절어 축 처진 어깨를 보며 내 안에선 또 다른 전쟁이 시작된다.
고요해진 거실에서 한참을 멀뚱히 앉아 있는다.
건강만 하라던 내 기도는 점수에 목매는 탐욕으로 변질된 걸까? 무엇을 위해 매일 이 전쟁을 치르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이가 성적표를 들고 웃길 바라는 걸까.
SKY에 합격하길 원하는 걸까.
아니면 내가 실패한 부모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걸까.
답이 없는 질문이 꼬리를 물며 가슴을 휘젓는다.
별똥별처럼 붉은 채점 자국이 남은 문제집을 덮는다. 내게도 깊이 패인 상처가 남았다. 그건 아이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잠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니 상처가 쓰라리다. 다시 한번 염치없이 세상의 모든 신에게 기도한다.
'오늘 밤, 이 아이의 잠이 더 편안하고 포근하길. 내게 받은 상처는 흔적없이 지워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