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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후반, 하고 싶은 게 많은 나이

지극히 평범하게 나이 먹는 중

by 이니슨

"나는 커서 화가가 되고 싶어"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던 6살 딸아이가 말했다.


"응. 그래. 뭐든 하고 싶은 걸 하면 되는 거야~ 단, 그걸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되겠지~?"


꿈을 말하는 아이를 위한 내 역할은 아이의 꿈을 응원하는 것뿐.



"엄마는 커서 뭐가 되고 싶어?'


아이가 뜬금없이 내게 꿈을 물어왔다.


"어? 엄마는....."


순간 무언가에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 꿈은... 사실, 내 꿈은 말이야....



30대 후반, 9살 아들과 6살 딸의 엄마. 98% 독박육아를 하는 엄마인 내게 꿈이라니. 꿈같은 건 밤에 꾸는 '개꿈' 혹은 '악몽' 외엔 없는 내게 아이는 천진난만하게도 꿈을 물어왔다.

"엄마는 너희의 좋은 엄마가 되는 게 꿈이야"


내 입에서는 상투적인 대답이 흘러나왔다.


아이에겐 미안하지만, 내 꿈이 그것일 리 없었다. 딱히 할 말이 없었던 것뿐. 생각해 보면 지금의 내게 꿈이란 게 있을 턱도 없었다. 곧 40을 바라보고 있는데, 사업을 하는 남편이 있는데, 나를 바라보고 있는 아이가 둘이나 있는데. 이제 와서 내게 꿈이라는 게 있을 수 있을까?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내게도 꿈이 있던 시절이 있었다.


고등학생 때 나는 작사가가 되고 싶었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인기 있는 멋진 노래 가사를 쓰고 싶었다. 학교 독서실을 땡땡이치고 가는 친구들을 위해 노래 가사를 빗대어 쪽지를 남기기도 했었다. 대학도 관련된, 글 쓰는 학과에 가고 싶었다. 그랬는데..


"돈도 안 되는 과 나와서 뭐할 건데?"


부모님의 말씀에 나는 '하긴 그렇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대학 입시를 앞두고 나는 부모님의 뜻에 의해 내 흥미, 내 능력과는 다른 학과에 지원했다. 심지어 고등학교 시절 문과였던 나는 이과인 공대에 지원을 하고 말았다. 하필, 나때부터 교차지원이 가능했다. 수학을 세상에서 가장 싫어했고, 또 못했는데도 공대라니... 컴퓨터학과, 부모님이 보시기에 취업이 잘 된다고 판단되는 학과였다.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 부모님의 기대에 버금가는 자식이 되는 것, 당시 내게 그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기준이었다. 확실치도 않은 꿈을 좇기에 난 너무 어렸고, 나 자신을 표현하기에도 부족했다. 그게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것인지 확신이 없던 것도 문제였다. 그만큼의 열정도 없었던 것 같다.




부모님이 원하는 학과에 갔고, 그곳에서 안정적인 성적을 내고 정상적으로 졸업을 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를 썼다. 시험도 달달 외우다시피 해서 봤던 것 같다. 아쉬운 것은 이과적인 사고력이 부족한 탓에 전공과목보다 교양과목들의 성적이 더 높았다는 것. 학과 관련 자격증도 (부끄럽지만)외워서 따냈다.


그 후엔, 누가 보기에도 부족함이 없도록 졸업 후 바로 취업을 했다. 나는 그렇게 살아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실패하지 않은, 평범한 삶이라고 믿었다. 당시 나는 확신이 없었다. 용기가 없었다. '취업'을 위해 학과를 선택했기에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해 볼 틈도 없었다.






40을 바라보는 나이가 돼서야 취업, 돈 되는 일 그런 것들이 전부는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제 와서 내 삶을 돌아보니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느낀다. 이제 와서야 아쉬움이 너무도 크다. 이제 와서야 하고 싶은 게 너무도 많다.



"나 요즘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


친구에게 이런 내 마음을 털어놨다.


"사실 나도..."


답하길 꺼리던 친구는


"나도 실은 배우가 되고 싶어. 조연이라도 배우가 돼보고 싶어"라고 했다.


미치겠다.


"나도! 나도야!!!. 나는 배우도 되고 싶고, 드라마 작가도 되고 싶어!"


"너 드라마 작가 잘 어울려"


"아니야. 나는 아이디어가 부족해서 안 돼"


나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라는 것이 반가웠다. 안심됐다. 또 안타까웠다. 나나 그 친구나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최근에 옛날 드라마를 보고 옛날 노래를 듣는데 이상하게 눈물이 나곤 한다. 그것들을 통해 내 과거를 떠올려본다. 그 시절 나는 어땠을까. 잊고 있었던 나를 끄집어낸다.


그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무엇을 하고 싶었을까. 나는 그게 정말 간절했을까.


당시엔 전혀 알지 못했다. 시간이 지난 후에 이렇게 그리워하게 될 날이 될 거라는 것을.



무언가를 꿈꿀 수 있다는 것은 살면서 얻을 수 있는 굉장한 축복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산다는 것은 태어나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행운이다.


나도 다시 무언가를 꿈꿀 수 있을까. 인생의 반을 살아온 내가 지금이라도 새로운 꿈을 꿀 수 있을까.


나이 든다는 것은 이런 것인가 보다. 포기해야 할 것을 알고 포기하는 것. 그럼에도 다시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는 것. 그러면 뭐하냐고!! 이제 와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새롭게 도전할 시간조차도 없는데!!!



40을 바라보는 나이, 내가 돌봐야 하는 두 아이, 내가 뒷바라지해야 하는 남편. 그게 내게 주어진 현실이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꿈이라는 걸 꾸고 있다. 말도 안 되게. 이 꿈을 좇자고 남편과 내 아이들을 부정할 수 없기에 그게 꿈이라는 것조차 모르고 살고 있지만.



최근에 기안84의 <회춘>이라는 웹툰을 즐겨보고 있다. 매 회차 볼 때마다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가슴속 깊은 울림을 느낀다. 나도 다시 어려지고 싶다는 생각도 간절해진다. 그럴 일 없겠지만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더 많은 꿈을 꾸고 싶다. 부모님의 기대보다 내 꿈을 쫓고 싶다. 그 꿈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싶다. 그래서 그 꿈을 설득시키고 싶다. 나를 감추고 낮추기보다 드러내고 높이고 싶다.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한동안 그렇게 현재를 부정했고, 지난 날을 그리워했다. 오랜 시간 혼자 방황을 했다. 사춘기처럼. 그 시간동안 아쉽다 생각했던 것들을 스무 살의 내게 전하고 싶다.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처럼 아쉬움이 아닌 기쁨으로 마흔을 맞이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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