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따박따박 말대답하는 거야, 지금?
큰 시누이가 내게 말했다. 말대답하지 말라고.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내 말투가 건방졌나', '내 표정이 안 좋았나' 싶기도 하지만 그 날의 분위기는 '너는 내 말에 토 달지마!'라는 강압적인 표현으로 느끼기에 충분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입을 틀어막고 생각을 닫아야 했다. 철저하게 나를 감춰야 했다. 대신 "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만 반복했다. 대체 무엇이 그리 죄송하고, 잘못한 일이었을까. 나는 왜 그렇게 죄인이어야만 했을까.
그런 내게도 변화가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두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더욱이 아들을 낳은 이후로 나도 조금씩 내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건 우리 가족의 모습에도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 날의 기억을.
굿. 무당이 신을 청하고 환대하고 환송하는 과정으로 구성된 무속의례. 그 날은 내 생애 첫 번째 굿, 그 생경한 경험을 했던 날이었다. 무속신앙을 믿었던 시가 식구들은 결혼을 앞두고 조상들에게 인사를 하는 의식을 치러야 한다고 했다. 그것이 굿이었다.
내 표정이 좋았을 리 없다. 불편하고 무서웠다. 더욱이 나는 당시 교회를 다니고 있었다. 나를 전혀 배려하지 않은 일방적인 그 곳에 끌려가듯 불려갔다. 절을 시키기에 하긴 하지만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낯설기만 했다. 그런 내 모습이 시어머니와 두 명의 시누이가 보기에 탐탁지 않았던 모양이다. 굿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차 한 잔 하자고 불러놓고 큰 시누이가 말을 꺼냈다.
"엄마 마음 좀 편하게 못 해 드리고 그렇게 싫은 티를 내야겠어?"
갑작스러운 분위기에 몹시 당황했지만 내게도 변명(?)거리는 있었다.
"네? 저는 오늘 처음 겪은 일이고, 집에서도 이런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듣고 자란 지라.."
나의 대답에 큰 시누이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너 지금 따박따박 말대답 하는 거야!!!!!"
차가운 공기가 흘렀다. 대역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냥 가만히 있을 걸..', '가식으로라도 좀 웃고 있을 걸 그랬나' 후회도 됐다. 큰 시누이 옆에서 나를 쏘아보는 작은 시누이의 시선까지 느껴져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오만가지 생각들이 머리를 스쳤다.
그 날부터였다. '입 다물고 살자'라고 생각했던 것은.
더군다나 결혼 후 큰 시누이에게 처음 들은 말이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이었기에 내 입은 돌처러 굳기라도 한 듯 무거워져야만 했다. 비단 내 입만 무거워진 것은 아니었다. 내 입의 무게에 비례하게 시가 식구들에 대한 벽이 두꺼워졌다.
근 30년을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왔는데 갑작스레 새로운 환경을 받아들이고 적응하는 것은 결코 쉬는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툭하면 떨어지는 시어머니와 시누이들의 부름과 불호령에 시가에 대한 거부감은 점점 커졌다. 어디 그뿐인가. 힘들어도 힘들다 말하지 못하고, 싫어도 싫다는 말 하지 못하고, 욿지 못한 것에 옳지 못하다고 말하지 못하는 데다 뭐라고 말이라도 하려고 하면 말대답을 하니 따지고 드니...라는 말을 들었으니 내 입장을 이야기 할 수 없어 속병이 쌓여만 갔다. 불만이 더욱 늘었다(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내가 참 '꼴보기 싫었겠다'는 생각도 든다).
어찌됐든,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고 했던가. 시간이 흐르고 두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나도 많이 변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꼬장꼬장했던 시어머니의 성격이 한풀 꺾이고, 나는 머리가 커졌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옆에서 늘 참견하던 시누이들을 보지 않게 된 것도 한몫했다. 내 안에 피어올랐던 불씨 역시 점점 작아졌다.
결혼 7년만에 나는 조심스레 '내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싫은 것은 싫다고 말했다. 무조건 버릇없이 "싫어요!", "안 해요!"가 아니라 정당한 상황과 이유를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긍정할 것에는 긍정하고, 부정할 것에는 부정했다. 처음에는 '이래도 될까?' 싶었지만 시부모님도 내 얘기에 귀를 기울여 주셨다. 덕분에 내 얘기를 하면서부터 시부모님이 편해졌다.
"어머님~. 어머님이 말씀하신 그것도 좋지만 그것보단 이게 더 나은 것 같아요~", "어머님~. 당뇨 있으신데 지금 이걸 드시면 어떡해요! 이거 말고 저거 드세요~."
할 말을 하니 시부모님과의 관계가 훨씬 좋아졌다. 예전에 비해 가족으로서 더 가까워진 느낌이랄까. 시아버지와 술도 마시는 관계가 됐다. 과거에 "쟤가 지금 지 시아버지랑 짠을 하는 거니?"라며 내게 몹시 불편한 기색을 하셨던 시어머니는 이제 술 마신 다음 날 속은 괜찮냐며 걱정을 하신다.
시부모님과의 관계가 편해진 덕에 아들 옆에서 살고 싶으시다는 시부모님의 말씀에도 그러자고 했다. 같이 사는 것에는 각자 불편하다는 이유가 있었기에 가까운 곳에서 서로 자주 보고 지내자는 의도였다.
며느리로서 무조건 "네!"라고 답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했다.
참고 사는 것만이 대한민국에서 며느리로 살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야 집안이 평화롭다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힘들다고, 싫다고 얘기하는 것이 버릇 없는 짓만은 아니었다.
내 얘기를 하기 시작하기까지 오랜 시간과 용기가 필요했지만 그 이후 가족으로서의 관계가 더욱 두터워졌다. 그러니 며느리도 용기를 내자! 싫으면 싫다고 얘기할 용기를~! 단, 가족으로서 진심을 담은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