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 펄펄 솟아나는 순댓국 한 뚝배기. 살이 통통하게 오른 새우가 가득한 새우젓으로 간을 하고, 들깨가루를 가득 두세 숟가락은 넣어줘야 그 특유의 고소함이 배가 된다. 사실 ‘이걸로 뽕이라도 뽑겠다’는 것처럼 들깨가루를 듬뿍 넣어 국물이 걸쭉해져야만 만족스럽다. 깍두기 국물을 넣는 것도 잊지 않는다. 여기에 송송 썬 청양고추까지 더해지면 순대와 돼지 내장에서 느껴지는 느끼함까지 잡아낼 수 있다.
크게 한 숟가락 떠서 깍두기를 올린 후 입에 쏙 넣으면 따뜻하고 구수한 게 그렇게 맛있을 수 없다. 순댓국밥 한 숟가락을 다 씹어 넘긴 후, 한 김 식히려고 공기 뚜껑에 미리 건져 놓은 순대를 새우젓에 찍어 먹으면 화룡점정! 절로 소주를 부르는 맛이다.
뚝배기를 살짝 기울여 남아 있는 국물까지 싹싹 긁어 먹은 후에야 부른 배를 두드리며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이미지=픽사베이
내가 순댓국의 맛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어릴 때 아빠를 통해서였다. 아빠는 가끔씩 냄비를 들고나가 순댓국을 사 오시곤 했다. 지금이야 포장 문화가 발달돼 전용 용기에 포장이 가능하지만 그때만 해도 포장을 해달라고 하면 그저 비닐봉지에 담아줄 뿐이었다. 당시 아빠는 냄비를 챙겨가면 양을 더 많이 준다고 했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냄비에 순댓국을 한가득 사 온 아빠는 가스레인지에 올려놓고 물을 두어 컵 정도 더 넣은 후 팔팔 끓였다. 지금에서야 이해되는 것인데, 아마도 그렇게 양을 늘리려고 했던 모양이다.
나에게는 따끈한 밥 한 공기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순댓국 한 그릇을 따로 챙겨주시고, 아빠는 밥 한 공기를 만 순댓국밥 한 그릇만을 챙겨 오셨다. 빨간 국물이 흥건한 김치 한 접시와 두꺼비 그림이 도드라지는 소주 한 병도 잊지 않았다.
“순댓국은 이렇게 새우젓으로 간을 하고”
순댓국밥에 새우젓을 넣는 아빠를 따라 나도 내 순댓국에 새우젓을 찔끔 찍어 넣었다. 자잘한 새우의 형태도 그랬지만 누린 내가 나는 것이 영 내 취향은 아니다 싶었다. 그래도 그렇게 해야 한다기에 찔끔 찍어 국물에 넣고 휘휘 저었다.
“이 들깻가루도 빠지면 안 되지~”
까무잡잡한 들깻가루 역시 맛있어 보이지 않았다. 넣을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 내 국그릇에 아빠가 들깻가루를 한 숟가락 듬뿍 넣었다.
“순댓국은 원래 이렇게 먹는 거야”
대충 섞은 순댓국 한 숟가락을 떠 입에 넣으려는 나는 아빠의 모습에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김치 국물까지 순댓국에 넣는 아빠였다.
“아빠. 그건 또 왜 넣어?”
경악하다시피 놀라 아빠에게 물었다.
“이렇게 하면 더 맛있으니까~”
빨간 깍두기 국물이 더해져 붉은빛을 내는 순댓국밥을 휘휘 젖더니 한 숟가락 크게 떠먹는 아빠가 그제야 만족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순댓국밥 한 숟가락에 소주 한 모금, 또 순댓국밥 한 숟가락에 소주 한 모금. 그럴 때마다 아빠는 웃는 건지 뭔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곤 했다.
“아빠. 술이 그렇게 맛있어?”
“그럼~. 이렇게 순댓국이랑 같이 먹으면 더 맛있지~”
아빠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새우젓에 들깻가루에 깍두기 국물까지 넣어서 흡사 개밥인가 싶은 것에 소주까지. 냄새만 맡아도 코 끝이 알딸딸하고 역한 냄새가 나는 그게 대체 왜 좋은 건지 당시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빠는 한국전쟁 시기에 태어나셨다. 아버지의 얼굴은 기억도 나지 않고, 어머니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형의 손에 자라셨다고 했다.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하셨다고 했었나. 당시만 해도 제대로 된 교육은 장남에게나 가능했기에 아빠는 일찍 사회로 나가 돈을 벌어야 했다. 장남의 교육과 가정의 가계를 뒷받침하기 위해.
우리나라가 경제발전에 총력을 쏟던 1960~1970년 대가 바로 아빠가 젊은 몸을 혹사시키며 열심히 일했던 때다.
10대 후반, 아빠는 은수저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아빠는 가계 수공업으로 은수저 만드는 일을 하셨다. 집에서는 기계 돌아가는 소리와 망치 두드리는 소리, 뜨겁게 달궈진 은수저를 차가운 물에 넣어 식히는 소리 등이 끊이질 않았다. 당시 아빠의 은수저는 서울 시내의 호텔, 백화점, 금은방 등으로 납품되곤 했는데 엄마가 은수저를 거래처로 갖다 주며 아빠의 일을 도우셨다.
풍족하진 않아도 부족함 없는 삶이었다. 가파른 언덕 위였지만 아빠 명의로 된 집이 있었고, 인정받는 은수저 만드는 실력이 있었고, 한 번씩 삼겹살 사 먹을 정도는 됐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그런데 빌어먹을, IMF가 터졌다. 아빠는 은수저 만드는 일을 그만둬야만 했다. 은수저를 찾는 사람들이 큰 폭으로 줄었기 때문이다. 거래처에서도 주문이 들어오지 않아 더 이상 기계 돌아가는 소리도, 망치 소리도 들을 수가 없었다.
택시 운전도 했다가 다른 사람이 운영하는 지방의 은수저 공장에 가서 일도 했다가.. 아빠는 이런저런 일들을 했다. 내가 느끼기에 우리는 여전히 부족함이 없는 삶이었지만 삼겹살 먹는 횟수가 줄었다. 그건 부모님이 나 모르게 어렵게 생활을 유지했다는 것이겠지.
돈벌이가 변변치 않아진 가장에게 설 곳은 없었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스스로가 그렇게 위축됐다. 엄마가 식당일을 나가기 시작하면서 아빠는 더욱 그렇게 됐다. 당신의 무능력 때문에 아내까지 고생을 시킨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빠는 그렇게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으니까.
갈수록 축 쳐지는 아빠의 어깨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좋지 않았다. 나는 결혼하면 남편이 어떤 상황에 있어도 절대 기 죽이지 말자는 생각을 그때부터 했던 것 같다.
그런 아빠에게 순댓국과 소주는 유일한 휴식처였을 것이다. 그거라도 있어야 숨을 쉴 수 있었을 것이다.
순댓국과 소주로 스스로의 삶을 달랬던 아빠가 이해되지 않던 나는 30대 후반인 지금, 아빠와 같은 방법으로 순댓국을 먹고 있다. 비록 아빠와는 다른 이유지만 내게도 순댓국의 깊은 맛으로 달래야 할 어려움이 있으니까.
순댓국으로 뜨거워진 목구멍을 차가운 소주가 쓰다듬는다. 내 안에서 타오르던 어떤 부정적인 것들도 그렇게 식어내린다.
순댓국 한 숟가락에 소주 한 잣을 원샷하며 말 못 할 눈물을 참아내고, 순댓국 한 숟가락에 또 소주 한 잔을 들이켜며 인내하는 방법을 배운다. 그렇게 새로운 희망도 찾아내고, 긍정의 에너지를 끄집어낸다.
사업하느라 바빠 대화할 시간조차 없는 남편, 등교가 원활하지 않아 계속 집에 있는데 말까지 통하지 않는 두 아이, 사람들과의 교류를 차단하는 코로나19, 혼자라는 외로움, 나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라는 좌절감. 그리고 그 외의 어떤 것들.
요즘 유독 진한 육수에 순대와 돼지 내장이 가득 든 순댓국이 생각나는 이유다. 표면이 하얗게 얼 정도로 차가운 소주와 함께라면 더욱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