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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을 두려워하는 쫄보다

작은 끄적임

by 이니슨

과거 경험했던 위기, 공포와 비슷한 일이 발생했을 때 당시의 감정을 다시 느끼면서 심리적인 불안을 겪는 증상이 '트라우마'다. 사람들이 각자의 트라우마를 갖고 있을 텐데, 나는 '사람을 두려워한다'는 트라우마가 있다.


그 일은 10여 년 전, 내 대학시절에 벌어졌다.



대학시절, 친구 ㄱ이 있었다. 내 기억에 ㄱ과는 1학년 입학 초부터 함께 다녔던 것 같다. 마침 사는 집도 멀지 않았다.


오랜 시간을 함께 했기에 나는 ㄱ과 내가 '당연히' 친하다고 생각했다.


3학년 때였나. 저녁에 학교 근처에서 ㄱ을 포함한 사람들과 기분 좋게 술을 마시고 지하철로 귀가하는 길이었다. 집이 멀지 않았던 ㄱ과 함께.


ㄱ이 집에 가기 위해 환승을 해야 하는 역 플랫폼. 술이 꽤 많이 취한 ㄱ을 집에 보내기 위해 ㄱ의 언니를 만나기로 했던 것 같다. 술이 취한 ㄱ은 비틀대며 혼자 집에 가겠다고 했고, 나는 ㄱ의 언니가 올 때까지 ㄱ을 잡고 있어야 했다. 그 과정에서 ㄱ은 내게 욕설을 내뱉었고, ㄱ을 잡고 있는 내 손을 손톱으로 긁기도 했다. 그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그렇게 실랑이 끝에 겨우 ㄱ을 언니에게 넘겼다. 그때까지는 괜찮았다.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술을 많이 마셨으니까. 그리고 우리는 친한 친구였고, 그런 모습은 그날뿐이었으니까.


그런데 ㄱ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다음 날 학교에서 ㄱ은 나를 슬슬 피했다. 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나는 "어제는 미안했어"라는 말 한 마디면 내가 들은 욕설도, 내 손등에 남아 있는 손톱에 긁힌 상처들도 다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ㄱ의 행동은 내 기대와는 달랐다. 완전히.


더욱이 ㄱ은 같은 학과 동기이지만 평소 친하게 같이 다니는 무리는 아니었던 무리의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ㄱ와 함께 친했던 다른 친구들이 내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나는 전 날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알게 됐다. ㄱ은 친구들에게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리고 그동안 내 흉을 보고 다녔다는 것을.


그동안? 내 욕을? 왜? 대체 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나와 다른 친구들이 추측하건대, 활동적인 내 성격이 싫었던 모양이다. 그럼 나한테 미리 말이라도 해줬으면 좋았을 것을. 내겐 그렇게 친하게 했으면서 뒤에서는 내 흉을 보고 다녔다는 것이 내겐 너무도 큰 충격이었다.


사실 누구에게 문제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ㄱ과 내겐 서로의 입장이라는 게 있고, 그 이후로는 ㄱ과 얘기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 문제는 내게 있었을 수도, ㄱ에게 있었을 수도, 우리 둘에게 있었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저 ㄱ과 내가 잘 맞지 않는 사이였을 지도.


그날부터였다. 내가 사람을 무서워하게 된 것이. 사람들의 눈치를 보게 된 것이.


내 앞에서는 웃던 그 아이가 다른 사람들에게 내 욕을 하고 다녔던 것처럼 모든 사람들이 내게 그럴 것만 같았다. 지금 내 앞에서 나를 생각해 주고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들조차 속으로는 내 욕을 할 것만 같았다. 내가 만나는 그 사람이, 내 앞에 있는 그 사람이 내게 보여주는 겉모습과 마음이 다를 것만 같아 불안하고 무서웠다. 그 사람의 속마음을 알 수 없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던 나인데 어느 누구도 만나고 싶지가 않았다. 그 사람들 역시 뒤에서 내 욕을 할 것만 같았으니까. 당시엔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마시고 울고 또 술을 마시고 울고. 그런 시간들이 반복됐다.


결국 나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쉽게 열지 못하고,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어떤 말을 하기 전에 속으로 열 번은 생각했고, 말을 한 후에도 그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 지금 나땜에 기분이 나쁜 건 아닐까?'

'지금 나한테 웃어주면서 속으로는 욕하고 있는 건 아닐까?'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지 못하니 내게 다른 사람들이 다가서기도 쉽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매번 '미안'했다. 누군가가 기분이 나빠 보이면 '혹시 나 때문인가?'라는 걱정부터 앞섰다.


"혹시 나 때문에 화났어? 미안해. 내가 생각이 좀 짧았어"


이유도 모른 채 사과를 하기도 했다. 나 때문에 나쁠 것 같은 그 사람의 마음을 풀어주고 싶었다. 그래야 미움받지 않을 것만 같았다.


이렇게 사람을 무서워하게 된 것도 힘들었는데, 늘 주눅 들어 있고 사람의 눈치를 보는 성격이 됐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 일이 있은 후 10여 년이 흘렀지만 나는 여전히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피곤한 삶을 살고 있다. 내 말에 반응하는 상대의 표정을 살피고, 상대가 기분이 좋지 않을 경우 그 이유를 내게서 찾으려 한다.


나 자신을 감추고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의 사람이 되려고 애쓴다. 내 감정보다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려 한다. 좋게 말하면 배려심이 깊은 거고, 나쁘게 말하면 자존감 따위 없는 거다.


다행인 것은 당시에 비해 정도가 많이 약해졌다는 것. 그리고 사람을 두려워하는 내 마음에 '평안'을 주려고 노력한다는 것.

최대한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으려고 애쓴다. 어떤 이에게 미움받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되뇐다. 덕분에 가끔은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사람을 만난다. 때때로 누군가에게 '자존감이 엄청 높은 사람'으로 보이기도 한다. 마음속으로는 생각이 많고 두려움이 가득한 쫄보지만.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너답게 살아라", "자존감을 높여라" 등의 말들이 아직까지 내겐 너무도 어려운 숙제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고 나니 이렇게 노력하고 천천히 변화하는 내 모습을 만나게 된 것처럼 시간이 또 흐르고 나면 어떤 사람을 만나든 눈치 보지 않고, 나다울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사람들의 시선에 스스로를 옥죄는 내게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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